▣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좌충우돌 세상읽기-122- 낙서로 시작하는 글쓰기
화장으로 얼굴색은 감출 수 있지만 눈에 서린 슬픔은 감출 수 없다. 슬픔은 얼굴색을 무시하고 눈으로 배어나오고 표정으로 배어나온다. 화장을 하면 얼핏 보아 그걸 눈치 챌 수 없지만, 아무리 화장을 짓게 한다 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얼굴을 보면 배어나온 마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얼굴은 얼핏 보면 그 사람의 이미지나 간판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마음의 모습이다.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듯이, 얼굴은 마음의 모습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모습을 정말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 노래 가사 중 “그리우면 왔다가 싫어지면 가버리는 당신의 이름은 무정한 철새”가 있다. 이 노래를 떠올리며 배설물을 생각한다. 정말 어쩌다 한 번 배설하고 배설물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적은 있어도, 배설물에 애착을 가진 적은 없다. 그저 배설물은 버리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굳이 배설물에 애착을 가진 적이 있었다면, 갓난애 적에 엄마의 보살핌이 소홀함을 틈타 어쩌면 배설물을 조물락조물락거렸을 적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난 전혀 기억이 없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모두 기억 못한다. 개연성은 있다. 갓난애들이 그런 경우는 많으니까.
갓난애 이후엔 대부분, 아니 누구나 배설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배설하고 버린다. 그저 비리는 것으로 끝난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말인 즉슨 뒤를 본다 말하지만, 그건 배설할 때뿐이고 배설하고 나면 뒤도 보지 않고 시원하다는 기분과 함께 미련 없이 가 버린다. 그러니 ‘마려울 땐 왔다가 싸버리면 가버린다.’
이처럼 우리 역시 삶을 미련 없이 배설할 필요가 있다. 누구에나 삶의 퇴적물은 쌓인다. 사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알게 모르게 퇴적물을 마음에 쌓는다. 그렇게 모인 퇴적물들, 마음에 고인 퇴적물들, 이걸 배설하지 않으면 마음에 적신호가 온다. 불안과 초조, 우울들, 그것을 그대로 참고 참으면 마음에만 있지 않고 몸에 적신호를 보낸다. 몸에 이르는 병의 근원도 알고 보면 마음의 병이 원인이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삶을 배설할 필요가 있다.
몸속에 쌓인 배설물, 톡 까놓고 말해 똥을 싸고 나면 상쾌하듯이, 상쾌하게 싸고는 시원하듯이, 삶에서도 배설해야 한다. 그렇게 쌌다고 치자. 그리곤 뒤도 안 보고 미련 없이 가버리듯이, 뒤돌아볼 필요 없는, 전혀 미련 없는 삶의 배설도 필요하다. 즉 글을 쓸 태 아예 작정하고 쓴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은 다 쓰고 오 분 후엔 모두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린다 생각하고 쓴다. 일단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면 평소에 못한 말, 마음에 품은 말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쌓인 말들이요, 마음에 고인 말들이다.
그러한 것들을 그냥 쌓아두고 있으면 나중엔 밖으로 언뜻언뜻 비춘다. 때문에 링컨은 자신의 친구가 한 사람을 천거했을 때 그의 부탁을 들어 면접을 본 후 그 대상자를 불합격시킨다. 친구가 이유를 묻자 “사람은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네.”라고 했더란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 얼굴만 봐도 가까이 갈 얼굴인지, 가까이하기 부담스러운 얼굴인지 드러난다. 그걸 첫인상 또는 인상이라고 한다. 아무리 속여도 남은 나를 안다. 나의 얼굴을 보아 내 마음의 모습을 본다. 내 평안한 모습은 억지로 안 된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편안한 얼굴을 만들어준다.
때문에 삶을 배설하자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썼다가 찢어버리리라, 썼다가 금방 태워버리리라, 이 생각으로 평소에 하지 못한 것들, 하고 싶은 것들, 금기시되는 것들, 하다못해 죄짓고 싶은 것들을 마구 쓰기이다. 그러고 나면 잔뜩 취하여 더부룩한 것을 토해낸 후처럼 마음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한 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가끔 그렇게 제 삶을 털어내면 마음이 알게 모르게 편안하다. 그러면 곧 인상이 좋아진다. 사람들이 나를 덜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하고, 그런 용기로 그걸 이어가면 사람들은 드디어 나를 편안하게 생각한다. 말과 행동은 몸이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주인은 실상 마음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별건가! 그러면서 점차 자신감을 얻으면서는 못 쓸 것보다 대부분 쓸 수 있는 것들을 안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터이니, 글은 곧 나의 삶의 배설물에 다름 아님에 박수를 치며 마음껏 신나게 배설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리라. 그러니 자 “쓰고 싶으면 썼다가, 싫어지면 찢어버리자. 당신의 이름은 상쾌한 낙서!” 낙서는 아무나 하나 썼다가 찢어버리는 사람이 하지. 똥 싸듯 낙서하자. 그것이 글쓰기의 지름길일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