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37- 시간을 말하다

영광도서 0 444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신약성서에 나오는 말씀이다. 깊은 의미를 논하지 않더라도 이 말씀은 쉽게 읽으면 차이 없는 시간이다. 차이 없는 시간은 다시 말하면 구분 없는 시간이니, 결국 시간은 따로 떼어 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구분도 안 되는 시간, 인간만이 시간을 구분한다. 시간으로 시간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로 시간을 구분할 따름이다. 만일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시간을 구분할 것이며, 상황이나 풍경이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계절을 구분할까? 태양을 중심축으로 놓고 스스로 자전하며 공전하는 지구 덕분에 일어나는 변화로 구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시간은 지구에 사는 인간만이 구분한다.

 

달리 말하면 신에게는 시간은 의미가 없으니, 성서에 담긴 깊은 의미는 차치하고 아주 쉽게 읽으면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이해한 들 어떠랴. 인간 스스로 발견한 시간, 그리고 인간은 시간 시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이처럼 의미와 가치가 부여 되고 나면, 그런 의미와 가치는 다시 그것을 만든 존재를 구속한다. 때문에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편리하기 위하여 만든 시간, 시간이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이제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은 시간을 숭배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다음에 인간은 시간에 모든 것을 매어단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의미를 매달면 순간을 즐기라는 카르페디엠, 미래의 어느 날에 의미를 매달면 죽음의 순간을 기억하라는 메멘토모리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시간을 구분하고, 다시 내 뒤로 흘러간 시간을 과거라 하고, 내게 머무는 시간을 지금 또는 현재, 나를 향해 다가오는 시간을 미래라 부르고, 그 시간들에 의미를 둔다. 이렇게 시간의 축을 기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그러면 설명이 편하니까.

 

이를테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는 말씀을 시간에 매달면, 믿음은 과거에, 소망은 미래에, 사랑은 현재에 연결 가능하다. 과거에서 지금까지의 어떤 대상을 관찰한 결과는 믿음이나 불신을 가져다준다. 여기서 불신이 아닌 믿음이 온다면 사랑으로 이을 수 있다. 믿음 없는 사랑은 없으니까, 믿기 때문에 사랑하니까, 이들에겐 미래는 소망으로 열린다. 이 세 가지가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바탕을 이룰 것이니, 이 중에 단연 현재가 제일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모든 시간의 축, 과거, 현재, 미래 또는 그 어떤 구분이든 가중 중요한 축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현재가 없으면 과거를 기억할 수 없고,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으니까. 현재는 모든 것의 축이요, 모든 시간의 축이요, 모든 존재의 축이다. 당연히 믿음이나 소망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시간의 왕은 현재이다. 현재가 곧 과거와 미래의 의미와 가치마저 지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모든 시간의 상황을 해석하는, 아니면 가치를 부여하는 절대적인 척도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기준으로 고통이나 괴로움, 기쁨이나 환희도 현재의 상황이 따라 의미와 가치는 달라진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다른 가치를 갖는다. 과거엔 고통이었어도, 슬픔이었어도, 지금 내가 잘살고 있다면, 행복하다면, 과거의 그런 상황도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물든다. 그러한 고통이나 슬픔 덕분에 지금의 행복한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나의 상황이 미래를 미리 불러 의미와 가치를 준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지금의 나에 만족한다면, 미래는 아름다운 색깔을 띤 초록빛이거나 보랏빛으로 다가올 것이다.

 

때문에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는 시간의 왕이다. 현재가 시간을 지배한다. 현재는 시간의 척도이다.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현재만 잘 조정하면서 살면 만사는 모두 해결된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어떻게 할 수 없어도, 현재를 잘살면 과거를 추억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는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나를 행복하게, 지금의 나를 삶에 만족하는 나로 만들면 그만이다. 메멘토모리의 정신으로 지금은 카르페디엠으로 살면 그만이다. 지금을 잘살면 만사해결이다. 때문에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하지 않던가! 무엇을 했느냐가 무엇을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그렇다. 까뮈는 말한다. ‘취할 수 있을 수도 있는 죽어 있는 미래를 위해 살아 있는 현재를 희생시키지 말라’고.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이것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글을 쓴다.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쓴다. 그러므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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