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좌충우돌 세상읽기-144- 마조히즘, 보편적인 삶을 말하다

영광도서 0 579

사디스트니, 마조히스트, 원래 성행위와 관련한 용어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심리로 대별하면 누구나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이는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누군가를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은 다른 의미로 마조히스트와 사디스트이다.

 

사디즘 또는 사디스트는 성해위 시 상대를 학대하는, 학대라기보다는 폭력을 가하면서 쾌감을 얻는 내용으로 가득 찬, 아주 에로틱하달까, 잔인하달까, 비이성적인 내용의 <소돔 120일>을 쓴 사드 후작의 이름을 딴 용어로, 그러한 행위를 즐기는 사람을 사디스트, 그러한 심리를 사디즘이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성행위를 하면서 학대를 받는, 쉽게 말해 폭력을 당할수록 쾌감을 얻는 사람을 가리켜 마조히스트, 그러한 심리를 마조히즘이라 한다. 이 용어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발리에 레오폴트 폰 자허 마조흐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마조흐는 매를 맞을수록 얻는 만족감을 주인공을 보여준다. 물론 약간의 폭행을 수반하는 의례적 모욕, 심한 채찍질, 멍이 들 정도의 심한 구타 등 다양하다. 이러한 성향을 즐기는 사람을 이러한 작품을 쓴 마조흐의 이름을 따서 마조히스트, 이러한 성향을 마조히즘이라 부른다.

 

이 둘은 서로 반대 성향을 띠지만 같은 상황에 놓일 것은 당연하다. 학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편엔 학대당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일회성이 아니라면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니, 마조히스트와 사디스트는 같은 상황에 있는 경우가 왕왕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용어들이 성행위와 관련한 학대성학이나 피학대성학을 이르는 말이긴 하지만, 이를 보편심리에 적용하면 학대함으로 얻는 안심과 학대당함으로 얻는 안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가 일시적인 폭력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자리 잡아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는 타인을 괴롭힌다는 것, 마조히즘이나 사디즘이 본능으로 갖고 나온다기보다 익숙해진 상황으로 발전하여 병적에 까지 이르면 문제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누군가는 누군가를 마조히스트로 만들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사디스트로 만든다.

 

누구나 다소간 마조히스트일 수도 있고 사디스트일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병적인 상황에 이르러선 곤란하다. 세상엔 대부분 마조히스트의 경향을 가진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사회적 강자보다는 사회적 약자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마조히즘 또는 마조히스트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러한 성향은 조금은 특수한 상황에서 생기는데, 이것이 나중에 익숙해지면서 자칫 병적인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에를 들면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달라졌지만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군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훈련소, 취침 전엔 반드시 점호를 받는다. 점호를 받을 시엔 거의 무엇이든 지적을 받아 혹독한 얼차려를 받는다. 그 환경에 익숙해진다. 그러다 어느 날 점호를 받았으나 아무런 얼차려도 받지 않고 무난히 취침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런 날은 잠이 오지 않는다. 왠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 잠이 막 들었는데 다시 기상 시켜 얼차려를 줄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오히려 점호를 받고 심한 얼차려를 받고 나면 그날의 일은 완전히 끝난 듯하여 잠이 잘 온다.

 

이러한 심리는 어린 아이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분명 잘못한 것을 인식한다. 그럼에도 부모는 아무런 언급도 안한다. 그러면 아이는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찜찜하다. 물론 방임형의 부모라면 아이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안심한다. 이 경우엔 아이는 자칫 학대성향으로 자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평소에는 잘못을 지적하고 벌을 주다가 벌을 주지 않는다면 안심하기보다 내심 불안하고 초조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하는 입장은 마조히즘의 상황이다. 이를 즐긴다면 마조히즘이지만 그렇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당하면 마조히즘이 아니라 폭력이다. 때문에 학대를 받으면서 즐겁다면 마조히스트이고, 어쩔 수 없이 당하면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사회란 곳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상황에 적응하며, 순응하며, 길들여져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일시적이 아니라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상황에 익숙해져서 그러한 성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 폭력을 당하며 마조히스트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런 거지, 그럭저럭 사는 거지 별 수 있나, 이런 생각으로 사는 대중 때문에 사회엔 일부 사디스트가 탄생한다. 마조히즘을 방기한 사회가 사디스트를 만든다. 때문에 누구든 불의에는 반항할 줄 알아야 하고, 폭력엔 맞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마조히스트 성향이든 길들여짐이든 침묵하는 내가 다른 사디스트를 양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울로 달면 보통사람은 누구든 마조히스트로 조금은 길들여져 있다. 그게 약자의 생존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익숙해짐, 그것을 즐김, 그것은 자랑할 일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나 또한 마조히즘의 병적인 상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폭력에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 의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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