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6- 처가와 화장실이 멀어야 하는 이유

영광도서 0 1,270

서울에 올라와서 화장실에서 실수한 적은 꽤 있다. 처음 좌식 변기가 나왔을 때는 웬만한 곳엔 좌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고급식당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좌식은 처음이라 시골에서 했던 대로 변기에 올라가서 볼일을 보았다. 무척이나 어려웠다. 소변을 볼 때는 뒤로 조금 움직여서 변기에 맞춰야 했다. 대변을 볼 때는 다시 앞으로 전진을 해야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볼일을 보고 나와서 당당하게 손을 씻고 있는데 하필 청소하는 아줌마가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불평을 했다.

 

“에고, 어떤 미친놈이 여기 올라가서 볼일을 본거야.”

 

분명 나 들으라고 큰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가만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아주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나는 이런 면에서는 둔해도 아주 둔했다.

 

한 번은 처가에서 실수를 했다. 처음 비데를 만났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은 아니었다. 적어도 서울에서 생활한 지 족히 20년은 넘어서였다. 변기에 올라가서 볼일을 보지는 않았다. 적어도 일은 제대로 보았다. 문제는 물을 내려야 하는데 무엇을 눌러야 할지를 찾았다. 일단 변기에서 일어나서 옷은 입은 다음이었는데, 여기 저기 무엇을 눌러야 하나 찾다가 아마도 비데를 누른 듯싶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눌렀는데 물이 나를 향해 확 쏘는 것이었다. 잽싸게 피했지만 물은 대략 뒤집어쓴 후였다. 어찌어찌해서 물 내림엔 성공을 하고, 옷을 말리려는데 장모께서 화장실 문을 두드리시면서 “안에 누구 있나?” 하시는데 나가기는 해야겠고 매우 난감했다.

 

이 두 실수는 시골에서 갈고 닦은 화장실 훈련 탓이었다. “처갓집과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아마도 시골의 화장실 문화 때문인 듯싶었다. 화장실과 본가를 멀리 두어 화재를 예방했던 때문인 것 같다. 화장실이랄 것 없이 대략 볏짚이나 옥수수 섶으로 지은 데다 그 안에 재를 버렸기 때문에 가끔 불이 나곤 했다. 그러면 그 불로 인해 본가에 옮겨 붙을 수 있었다. 본집 역시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불에 매우 취약했다. 때문에 그런 말이 생긴 것 같다.

 

화장실은 본집에서 떨어져 있었다. 잿간이라고 불렀다. 볼일 중 소변은 대략 아무데서나 봤다. 대변을 볼 때만 잿간에서 봤다. 건물이라기보다 대략 기둥 몇 개 세우고 볏짚으로 가리거나 옥수수 섶을 인디언 집 모양으로 세워서 만들었다. 때문에 비가 올 때면 빗물이 줄줄 샜다. 문도 달려 있지 않아서 그냥 몸만 가린 셈이었다. 때문에 안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누군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조심해야 했다. 그러다 기척이 들리면 얼른 헛기침으로 ‘어험 어험’하면 안에 사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갔다.

 

안에는 볼일을 보기 위해 어깨 넓이쯤으로 댓돌 둘을 나란히 놓았다. 댓돌을 중심으로 앞쪽엔 재를 부어 두었다. 재 옆에는 망가진 삽이 있었다. 댓돌 뒤쪽은 앞보다는 훨씬 넓었다. 볼일을 본 다음엔 앞에 있는 재를 삽으로 일정 양을 끌어당겨서 똥과 재를 섞은 다음 뒤로 밀어버렸다. 그렇게 재와 섞인 똥은 거름이 되어 쌓였다. 그렇게 겨우내 쌓은 거름은 다음해에 거름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화장지도 따로 없었다. 신문지나 공책 종이를 이용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겨울엔 옥수수 잎 중에 부드러운 것을 골라서 쓰거나 짚을 쓰거나 했다. 여름엔 콩잎이나 호박잎이 제격이었다. 빳빳했지만 엉덩이가 상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피부도 잘 적응했다고나 할까.

 

이런 구조적인 취약점 때문에 그렇게 조심을 하는데도 가끔 불씨가 완전히 죽지 않은 잿불이 바람이 불 때 불씨가 살아서 불이 나기도 했다. 잿간은 집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화재를 면하는 때가 많았다.

 

우리 동네에 잿간이 아니고 똥통을 묻은 집은 개울 건너 옆집인 황씨네뿐이었다. 송판으로 짠 통을 묻어서 똥을 쌀 만한 구멍을 뚫은 변기라면 변기였는데 거기에 똥을 받았다가 거름으로 사용했다. 비가 오거나 하여 똥물이 고여 있을 때는 그 집에선 무척이나 재주를 부리면서 볼일을 봐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똥물에 엉덩이가 공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하얀 구더기도 유독 많이 득실거렸으니까. 그놈들 잡는 데는 핸경나무 뿌리나 할미꽃 뿌리를 짓찧어서 넣는 게 제격이었다.

 

사람이란 것이 간사한지라 어쩌다 산에 갔다 급히 볼일을 보고 나서 화장지가 없으니 나뭇잎 중에 그런 대로 가장 부드러운 것으로 엉덩이를 닦아보니 잘 닦이고 안 닦이고를 떠나 뒤가 쓸리는 기분이다. 예전에는 그보다 더 억센 마른 잎으로 닦아도 멀쩡하던 엉덩이도 벌써 변덕을 부린다. 이제는 모두 사라진 문화, 다시 만날 수 없는 문화, 시골 어디에도 이런 화장실은 이제는 없는 듯싶다. 이 또한 모두 지난 일이라 추억으로 남아 혹여나 엣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면 참 재미있는 소재로 쓸 수 있을 텐데 누구 하나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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