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0- 노란 옥수수 빵의 추억

영광도서 0 462

의식주, 동물 중에서 인간에겐 이 세 가지가 아주 중요하다.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 인간의 기본 욕구는 여기서 출발하고, 이게 채워지고 나야 다른 욕구로 발전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모래도 있듯이,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이 셋을 충족한 다음에야 생각이 나지, 최소한 이것들을 충족하지 못하면 다른 것은 꿈도 못 꾼다.

 

물론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이 욕구들마저 끝까지 만족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 채워지면 그 이상을 꿈꾼다. 더 맛있는 음식을 찾고, 더 좋은 옷을 찾고, 더 편안한 곳을 원한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이 셋을 끝까지 만족하지 못한다. 물론 다는 아니다만.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때문에 ‘더 좋은, 더 편안한, 더 안락한’을 덧붙여진 욕망이 없는 상태에 만족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쾌락주의라 한다. 쾌락이란 모든 걸 다 채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선에서 만족할 줄 아는 삶의 모습을 그는 주장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기억을 더듬으면 제일 먼저 생생하게 떠오르는 일들은 의식주와 관련한 것들이다. 특히 먹을 것으로, 생존에 직접 관계있는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6키로 족히 되었다. 도시락도 못 가지고 다녔다. 때문에 집에 돌아올 때면 철따라 다르긴 하지만 삐삐라고 부르는 억새 이삭을 뽑아 먹거나, 찔레를 꺾어 먹거나 시금을 뜯어 먹거나 하면서 돌아왔다.

 

우리 집은 특히 가난했다. 산나물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이을 때라 도시락은 생각도 못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나마 도시락을 싸 왔다. 대신에 가난한 집들 중 극빈 가정의 가정에겐 학교에서 옥수수 빵을 쪄서 나누어주었다. 무료이긴 했지만 대신 한 달에 장작을 한 짐 만들어 학교에다 제공해야 했다. 당연히 아버지께서 장작 한 짐씩 만들어 학교까지 지게로 져다 주셨다. 1학년 때엔 노란 옥수수 죽이었다. 기억하기론 미국에서 구호미로 받은 옥수수, 황옥으로 만든 빵이었다. 학교 옆 관사 옆에 빵을 찌는 큰 기계가 있었다. 거기에 장작을 넣어 빵을 찌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그걸 담당했다. 그렇게 찐 빵을 점심때 나누어주었다.

 

두부 모처럼 사각형의 빵을 한 개씩 나누어주었는데, 맛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걸 하나 받으면 먹고 싶었지만 먹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도 집에 있는 누나와 작은형 그리고 동생을 생각해서 차마 먹지 못하고 집에 가져왔다. 돌아오려면 배도 고프니 먹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다. 그럴 때면 손톱만큼 한쪽 귀퉁이를 떼어 먹고는 집에 가져왔다. 그러면 작은누나가 그것을 칼로 똑같이 잘라서 나누어주었다. 작은누나는 그것을 보무님 몫까지 정확하게 한 조각씩 나누었다. 조각의 크기, 아무리 큰들 얼마나 크겠나 싶지만, 그렇게 나누어 먹으니 더 맛이 기가 막혔을 터였다.

 

2학년 때엔 노란 옥수수 빵에서 흰 밀가루 빵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전학생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던 것 같다. 맛이 한결 부드러웠다. 그러다 그게 번거로웠던지, 우유가루와 밀가루를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그것을 집에 가져오면 밀가루는 땟거리로 삼고 우유가루는 엄마가 쪄서 주셨다. 무척이나 딱딱했다. 이빨이 안 들어갈 만큼. 억지로 깨서 먹어야 했다. 나중엔 좀 더 발전하면서 건빵으로 바뀌었다. 무엇을 주든 고스란히 집에 가져오곤 했다.

 

제사 때는 그토록 쌀밥을 먹으려고 잠을 안 자고 기다리던 나였으니, 식탐이 있을 법한데, 다른 아이들은 다 먹고 돌아오는데, 끝까지 집에 남겨서 돌아온 걸 보면 식탐이 없었던 듯싶기도 하다. 지금이야 봐도 본체만체할 음식들이지만 그때는 그토록 맛이 있었던 음식들, 철없는 나도 인간애는 품고 있었던 듯싶다. 그 어린 나이임에도.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부모를 닮는 건 맞는 듯싶다. 비록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먹을 것이 생기면 그것이 무엇이든 어미 새처럼 집에 가져 오셨다. 병으로 자리에 눕기 전까지는 까만 비닐봉지에 그것을 담아 오시기까지 평생 그러하셨다. 나 역시 아버지의 그런 면을 닮은 탓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먹거리가 생기면 혼자 먹지 않고 어미 새처럼 때로는 까만 봉지에 그걸 담아 집에 가져오곤 한다. 나 혼자 먹는 것도 좋지만 그걸 가지고 돌아와 식구들이 맛있게 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서일 터이다.

 

먹 거리, 맛보다 채우기 바빴던 시절, 소리 없는 수채화처럼, 그다지 칙칙하지 않은 정겨운 수채화처럼, 그때 그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시 그 시절처럼 살라면, 글쎄다. 다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정겹다. 가난했지만 그게 사람다운 사람, 사람답게 살았던 것 같아서다. 사람이었다. 내가 아닌 남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하고 좋아하는 건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그랬다. 지금은 많이 타락했다만 그때는 많이 순수하기보다 순진하고, 인간다웠던 것 같다. 요즘 같으면 이렇게 쓰겠지.

 

“나는 그때는 인간이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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