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1-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의 추억

영광도서 0 460

훈련소에서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는 라면이듯이, 가장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가장 맛이 있고 기억에 진하게 남는다. 그럴 때의 그 맛은 잊지 못한다. 그럴 때 때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니까. 얼마든 조건이 될 때 먹는 음식은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건 그냥 일상에 불과하게 잊힌다. 어쩌면 처음일 때 기억에 남고, 무척 배가 고플 때 먹은 음식이 기억에 남고 특별한 인연이 있을 때 기억에 남는다.

 

어렸을 때라고 적어야겠다. 솔직하게 그때가 몇 학년 때였는지, 몇 살 때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장 구경을 갔다. 장 구경, 쉽지 않았다. 오일장은 3일과 8일에 열렸는데, 우리 집에서 6킬로미터는 넘었다.

 

장이 열리는 면소재지인 홍천군 내촌면 도관리에서 바라보면 높이 솟은 산이 있으니 백우산이다. 백우산을 독수리라고 한다면 도관리에서 우측 날개 끝쯤에 있는 고개가 가족고개이다. 그 산을 향해 상당히 가파른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오르면 그 고개를 만난다. 고개 넘어 첫 동네가 가족동이다. 그러니까 가족고개는 도관리와 광암리의 경계이다.

 

가족고개는 제법 넘기 쉽지 않을 만큼 높다. 여기엔 아주 근사한 소나무가 있었으니, 신령나무였다. 단오 때엔 어른들이 모여 짚으로 밧줄을 만들어 이 나뭇가지에 걸어서 그네를 맸다. 그때 하루라도 동네 쳐녀 총각들은 일을 하지 않고 그네를 즐겼다. 누가 더 높이 그네를 타고 하늘로 오를 수 있는지 시합을 벌였다. 장에 오가는 사람들에겐 넉넉한 그늘을 제공하는 쉼터 역할도 제공했다. 그 대신에 일 년에 한 번 이 신령한 나무님은 돼지고기를 흠향하실 수 있었다. 지금 같아선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만큼 아주 수령이 오랜 소나무였다. 도로가 확장되면서 그만 서가하셨다. 동네 어른들이 지금처럼 깨었다면 아마도 결사반대하여 신령님을 살렸을 텐데.

 

그 고개를 넘어 조금 내려오다 좌측으로 삼사백 미터 쯤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산발치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러니까 장에 가려면 일단 가족고개를 넘어야 했다. 아주 드문드문 있는 우리 동네,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장에 가는 날, 고개에 올라서 조금 내려가려니 아래쪽 저 만치에 면소재지가 보였다. 집들이 제법 모여 있는 게 신기했다. 우리 살던 동네는 산을 하나 넘어야 한 집씩 있어서 집이 모여 있는 곳을 볼 수 있었으니까 신기한 건 당연했다. 그때 아버지께 물었다. “아부지, 저기가 서울이어유?” 그 한 마디의 질문, 아버지가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 표정은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만, 그 한 마디와 그곳의 윤곽은 그림처럼 심상으로 남았다.

 

그날 장에 따라가서 무엇을 했는지, 아버지께서 무엇을 사셨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기억에 남는 건 자장면이다. 그건 용케 기억에 생생하다. 장터에서 우리 집에 오려면 도로에서 좌측으로는 면사무소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인제 현리로 가는 길, 그 길을 가로지르면 내촌중학교로 가는 길이면서, 그 길을 따라 이어지는 신작로를 따라 까마득한 고개를 넘으면 우리 동네이다.

 

바로 장터에서 나와서 만나는 도로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초입에 무슨 면옥이 있었다. 식당 이름은 기억에 나지 않는데 그 집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 집에서 난생처음으로 자장면을 먹었다. 가격이 얼마였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께서 약초 캐서 말린 것들을 잔뜩 지게에 지고 가시는 길에 나를 데려가셔서 자장면을 사 주신 것이었다. 그 맛은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어떻게 넘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는 절대로 자장면을 아버지가 사주셨다고 형에게도 동생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말 잘 듣기로는 최고인 나이니 당연히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만큼 맛있는 자장면을 먹은 적이 없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먹은 자장면이 몇 그릇이나 되랴. 엄청 많다. 하지만 자장면 하면 그때 그 자장면만 생각난다. 그걸 한 그릇 사주시기 위해, 아버지는 산에서 애써 약초를 캐었을 텐데, 그 먼 길을 무겁게 그것을 지게에 지고 가셨을 텐데, 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항상 광목으로 만든 옷만 입으셨던 아버지, 자장면 한 그릇 값이 그때만 해도 제법 되었을 텐데, 그때 아버지는 무엇을 드셨을까? 나만 자장면을 사주시고 어쩌면 보다 싼 잔치국수나 드셨을지 모른다. 지금에야 돌이켜 생각하니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과 함께 고마운 마음이 엉켜 어떤 게 내 진심인지 모르겠다만 늘 인자하기만 하셨던 아버지가 문득 그립다. 그때 아버지는 내게 자장면을 사주시고 먹는 모습을 지켜 보시면서 어떤 마음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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