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7- 잠시 동안의 충만한 기쁨은 사리지고
행복이란 돈이 많다고도 아니고, 돈이 적다고도 아니다. 그냥 마음에 있다. 어쩌면 많이 알수록 더 불행하다. 아니 불행을 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비교대상이 없으면 배고파 죽을 지경이 아니라면 그런 대로 살만하다. 누군가 나보다 잘 먹고 잘 입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그게 문제지, 다 고만고만하게 살면 그런 대로 살만한 게 아닌가 싶다.
그 덕분에 나 어렸을 적엔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고만고만했기 때문에 그게 삶이려니 했을 터이다. 거의 비슷비슷한 옷을 입었다. 거의 비슷비슷한 먹을거리, 게다가 머리, 모두 빡빡머리라 그야말로 평등했다.
왠지 모르지만 내겐 초등학교 2학년은 특별한 해였다. 기억이 많이 남는 해였다. 그 중 단연 생생한 기억은 극빈 학생 중 셋이 우리 반에서 뽑혔는데, 나도 그 중에 속했다. 뽑힌다는 게 자랑 거리라면 좋겠다만, 부끄러웠다. 선생님께서 학교에서 이발할 집을 알려주며 우리 셋을 이발하러 보내셨다. 이발이라야 빡빡머리였지만 당시엔 그나마 머리 깎기가 쉽지 않았다. 선생님이 지정해준 집도 이발소는 아니었다.
당시엔 이발하는 곳은 동네에 한 집 정도 있었다. 어디서 이발을 배웠는지는 몰라도 한 집은 있었다. 전무적인 이발사는 아니고 농사를 지으며 잠깐 짬을 내서 이발을 했기 때문에, 일터로 나가기 전이나 일이 끝난 저녁때쯤 찾아가야 이발을 할 수 있었다. 머리라야 아이들은 거의 모두 빡빡 깎기였고, 청년들은 상고머리, 어른들 모두 같은 형, 이런 정도로 대략 세 가지뿐이었다. 이발 비는 거의 대부분 일 년 단위로 곡식으로 지불했는데, 어른은 콩 한 말, 아이들은 콩 다섯 되었다.
우리 동네엔 우리 집에서 북동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옥이네 집이 동네 이발소인 셈이었다. 산을 등진 동남향 양지바른 집이었다. 옥이는 나보다 어렸다. 옥이 어머니는 키가 좀 큰 편이었고, 대신에 옥이 아버지는 키가 보통사람보다 작았는데, 옥이 아버지가 동네 이발사였다. 어디서 어떻게 이발을 배웠는지 몰라도 바리깡이라는 것으로 머리를 깎았다. 해 뜨기 전에 옥이 아비지가 일 나가기 전에 가야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도구라야 바리깡이라는 이발기계와 가위 그리고 빗 정도뿐이었다. 때로는 이발기가 잘 안 들어서 머리를 씹기도 하여 무척 머리가 아파서 머리를 깎기를 꺼렸다. 그렇게 이리 저리 안 깎다가 어쩌다 한 번 명절 때나 깎았다. 아버지만 일 년 동안 깎는 것으로, 애들은 그런 식으로 일 년에 몇 번 깎는 것으로 하여 일 년 단위로 계약을 했다. 그러니 우리 형제들은 머리를 자주 깎지 못했다. 대신 어쩌다 머리가 많이 길면 엄마가 가위로 까까머리로 깎아주셨다. 문제는 엄마가 머리를 깎으면 가위로 깎으셨기 때문에 제대로 빡빡 깎이지 않아 군데군데 마치 불타다 만 들판이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해서 머리를 깎는 게 싫었다.
그런 어느 날 용모불결로 우리 셋이 뽑힌 거였다. 선생님이 보기가 흉했는지 우리 셋을 골라 학교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이발사집으로 보냈다. 선생님이 따로 아는 집인가 싶었다. 이발 비는 우리가 내지 않았으니 선생님이 내주신 것 같았다. 학교를 기준으로 하면 우리 집과는 반대방향에 그 집이 있었다. 학교에서 강을 건너면 넓은바위, 그곳에서 우측으로 고개를 넘으면 능아터, 좌측으로는 웃괘석으로 가는 길인데, 갈레에서 중간쯤으로 가다가 있는 집이었다. 그때 머리를 어떻게 깎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기억에 진하게 남은 건, 우리 셋 C, L 그리고 나 셋 중에서 L이 200원을 갖고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 돈으로 이발하러 가다가 넓은바위에 있는 가게에서 연필이며, 색연필이랑 학용품이며, 여러 과자를 잔뜩 샀다. 그리곤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도 그것을 받았다. 받아서 책보에 두툼하게 쌌다. 당시엔 책보에 책을 싸서 다니는 때라 책을 싸서 전대를 메듯 메고 책보를 메고 다녔다. 나 말고 둘은 과자를 먹었지만, 나는 집에 있는 누나 그리고 작은형과 동생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나도 먹지 않고 책보에 쌌다. 기분은 무척 좋았다. 집에 가서 나누어 먹을 생각, 처음으로 가져보는 학용품, 생각만 해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런데 운이 없었다. 머리를 깎고 다시 집으로 가려면 학교에서 강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로 가야 했다. 신작로를 따라 가고 있는데, 그 애 누나가 친구들과 학교 앞 강의 넒은 보에서 멱을 감으며 놀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자기 누나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거였다. 몸을 낮추어 길가에 우거진 나무에 숨으며 지나가자고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우리 셋은 허리를 숙이고 지나는 중이었다. 어찌 알았는지 그 애 누나가 목욕을 하다 말고 우리를 따라와 잡았다. 그리고는 책보에 싼 것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 바람에 기분 좋은 것도 잠시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 돈은 그 애가 집에서 몰래 가져온 돈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마음엔 참 억울했다. 억울했다기보다 무척 아쉽다고 할까 무척 아까웠다. 차라리 과자 맛이라도 봤으면, 실컷 먹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게 그때 내 마음이었다.
그때 얼마나 그것이 아까웠던지, 가끔 그때 일이 생각난다. 나의 것이 아니라 공짜로 얻었던 것을 도로 빼앗긴 것뿐인데 억울한 심정이었던 그때가 생생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과자라도 먹을 것을, 맛이라도 볼 것을, 하는 생각이 두고두고 떠오른다. 1원에 두 알을 살 수 있었던 비과나 작은 사탕이며, 그보다는 조금 비싼 크라운산도, 건빵, 지금은 얼마든 살 수 있으나, 그때는 큰 맘 먹었던 그것들, 눈앞에 선하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천만에 아무리 추억이 아름답다고 해도 그런 추억으로는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으냐고? 아니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다만 만일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난 아직도 그걸 혼자 먹지 않고 집으로 싸서 돌아올 것이고, 그걸 혼자 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게 부정적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란 전제에서 말이다. 그 점만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면이다. 다른 것은 둘째 치고 그런 점으로만 보면 난 괜찮은 사람이다. 우리 아버지를 닮아서, 아니 우리 어머니를 닮아서다. 가난했지만 누구한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사셨던 울 엄마, 울 아버지는 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