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8- 순진한 애향단 시절의 추억

영광도서 0 443

지난 시간들은 아무리 애써도 되돌려지지 않는다. 한 번 지난 삶을 다시 살 수도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지나가면 시간을 상징적으로 또는 기억에 잡아두려 애쓴다. 특별한 장면이나 기억에 남기고 싶은 장면을 카메라로 찍거나 동영상으로 찍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진이나 동영상에 담긴 모습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그나마 기억으로 시간을 멈춘다. 잡힌 시간들은 다시 펼치면 그때 그 일을 환기시켜준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온 삶의 날들, 그 시절엔 카메라조차 구경도 못했으니 문명의 도움을 받아 기억할 수도 없다. 일기장도 있었을 터이나 그나마 흔적조차 없다. 지난 일을 환기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내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케케묵은 쓸모없는 기억들, 환기한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일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란 것도 그렇지 않는가. 아무리 위대한 역사라도 역사의 가정이란 없으니 소용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려 하고 공부하려 한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기록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역사에서 현재 정치현장의 지혜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역사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날들의 기록 그리고 되새김도 하찮은 의미는 있지 않으랴. 나만의 삶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삶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감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까. 또한 삶의 모습은 아주 많이 변할지라도 인간인 한에 있어서 인간 각자의 밑바닥에 흐르는 본성은 변함이 없을 테니,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하찮을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무리들의 삶도 가치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렇게 위안하며 내 기억을 소환한다.

 

어리석었든 순진했든 우리 시대엔 반공정신이 아주 투철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5-6킬로미터는 되었다. 우리 반에서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학생을 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책보에 책을 싸가지고 다녔다. 학교에 들어갈 때는 책보를 겨드랑이 사이데 끼고 들어갔지만 그 전까지는 전대를 메듯 책보를 남학생은 대각선으로 메고 다녔고, 여학생은 허리에 차고 다녔다. 가는 길이 지루했기 때문에 굴렁쇠가 있는 아이들은 굴렁쇠를 굴리며 신작로를 달렸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나뭇가지가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잘라서 거꾸로 하여 갈라진 곳에 책보를 붙잡아 매고는 끌고 다녔다. 나뭇가지가 끌리는 소리를 재미삼아 학교 앞까지 끌고 다녔다.

 

토요일엔 그나마 그렇게 다니지 못했다. 집에서 2킬로미터쯤 되는 곳, 이전에는 천주교가 잇던 곳의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외슬배기라 했다.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되는 그곳에 마당만큼 넓은 공간이 있었다. 토요일엔 가족동 학생들 모두 모여서 갔다. 소위 애향단은 동네별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나는 가족1동에 살았고 2반도 함께 한 애향단에 속했다. 애향단장은 6학년 형이 맡았다. 거기서부터 학교까지 신작로를 따라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듯 걸었다. “조국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라든가 “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 세운 공도 찬란한 맹호부대 용사들” 등 모든 노래는 군가였다. 한 곡이 끝나면 이어서 애향단장이 노래를 시켰다. 그렇게 학교 운동장까지 가서 해산하기 전에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분쇄하자 적화야욕!” 세 마디를 마치고 기합소리를 내며 해산하고는 각자 교실로 돌아갔다. 또한 토요일엔 열두시에 전교생이 모여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애향단별로 다시 집으로 향했다. 외슬배기에서 다시 해산했다. 모두 어김없이 잘 따랐다.

 

순진했다고 해야 하나, 어리석었다고 해야 하나, 순진했다. 구멍가게 또는 학교에 벽보판이 있다면 거기엔 간첩신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간첩신고는 113 신고하여 상금타자!”란 표어는 그렇다 치고, 하긴 우리 동네엔 전화가 없었으니 신고도 쉽지 않았을 터였다. 문제는 포스터에 간첩이라고 그려 놓은 것이 빨간색으로 그린 늑대의 모습이었다. 어렸지만 간첩을 보면 신고를 하고 싶었으나 간첩은 사람이 아니라 늑대인 줄 알았다. 그러니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우리 동네에 왔다 한들 나는 몰랐을 게 뻔했다. 한편으로는 북한과 극단적인 대치 속에 긴장하며 살았던 때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아주 투철한, 국기마저 신성하게 생각하며 산 시대였다.

 

세뇌라면 세뇌, 학습이라면 학습, 다시는 오지 않을 시대, 다시는 와서는 안 될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다. 그때 함께한 아이들이 이제는 더 이상 아이이기는커녕 할매, 할배들이 되었을 터이다. 지금의 삶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라고나 해야 할까? 지금의 아이들에 비하면 아주 어리석게 살았든 순진하게 살았든 우리가 살아온 삶의 모습들이다. 사진으로 볼 수도 없는 우리들의 삶, 역사는 기록에 남지만 우리 소시민의 삶은 기록에도 없으니, 그림이라도 잘 그릴 수 있다면 실감나게 그려보고 싶다만 그럴 재주도 없으니 글로라도 환기한다. 소시민의 역사인들 왜 소중하지 않은가. 한 시대의 풍속사이기도 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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