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9- 전쟁의 흔적들의 기억
“복현아! 넌 나하고 나이 차이가 꽤 있는데, 어떻게 너도 그렇게 살았다고?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 아냐? 야! 니 이야기 읽으니 옛날 일이 새롭다. 코로나사태 끝나면 만나서 밥이라도 함께 먹자!”
문자나 카톡으로 종종 안부를 묻고 지내는, 평소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문제가 있으면 서로 상의도 하는 형이 전화를 하셨다. 무척 반가웠다. 자기관리를 아주 잘하는 형이라서 닮고 싶은 분으로, 암벽 타기, 등산하기를 좋아하신다. 어찌나 자기관리를 잘하시는지 몸이 20년은 젊을 만큼 유연하고 단단하시다. 요즘 내가 쓰는 잃어버린 시간을 읽으면서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야기 같다며, 깊은 산골이라서 그런가 보다 말씀하신다.
어떻게 보면 아주 먼 옛날이야기 같고, 어떻게 보면 그다지 먼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내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하면 도시에 자란 이들 나와 같은 경험이 없는 이들은 더 먼 이야기로 판단하는 듯하다. 지금은 판데믹이니 글로벌이니 하여 지구 곳곳의 사건들이 일어난 지 하루도 안 되어 세계로 퍼지는 요즘과는 달리 텔레비전이니, 심지어 전화도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시대엔 같은 시대를 살아도 곳에 따라 처지차이였던 듯싶다. 나중에 알기로는 리 단위에서 전기가 안 들어갔던 곳이 우리나라에서 4곳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곳이 내가 사는 동네였다니. 깊고 깊은 산골이긴 하다.
해발 700미터는 족히 되는 하늘 아래 첫 동네였다. 895미터 높이의 백우산을 중심으로 남쩍은 도관리로 면소재가 속한 동네가 있었다. 면소재지에서 북쪽을 보면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높이 솟은 산을 군사비상도로로 넘어야 동네, 여기에도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구나 싶은 동네가 내가 사는 동네였다.
그나마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쯤에 라디오 있는 집이 한 집 있었다. 약과쪼가리 같은 배터리를 밖에다 달고, 스피커가 따로 있는 라디오, 밖에다 안테나를 달아서 들었던, 그럼에도 가끔 지익지익 거리던 라디오를 그때 처음 봤다. 무척 신기했다. 그 작은 안에 어떻게 사람들이 들어가 사나 싶었다.
전화는 그나마 나중에 학교 건너편에 있는 가겟집이면서 한때 이장을 한 박 이장네 집에 군사용 전화, 까만색으로 다이얼도 없고 손잡이를 한참 돌려야 받는 전화 한 대가 있었다. 내가 스물넷에 이사 나오기 전까지 전화는 여전히 아무 집에도 없었다. 텔레비전은 언급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나중에 자동차용 배터리를 이용한 텔레비전을 허씨네가 구입하긴 했다만, 세상 소식이라곤 아는 게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모르고 사니 세상이 그런가 싶었다.
백우산 바로 밑에는 소위 국토재건단이라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화전을 일구어 계단식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게 했다. 소위 화전민 촌이었다. 지금은 산으로 변했지만 내가 청소년이 되었을 무렵, 그나마 작은 농토를 마련하여 이사한 집이 백우산 아래 첫 집이었으니 해발 800 가까운 곳에 살은 셈이었다.
어렸을 때는 전쟁의 흔적이 꽤 남아 있었다. 개천이나 밭에는 탄창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탄피가 열 개 든 탄피와 탄창도 있었고, 작은 탄피는 많았다. 가끔 엄지손가락만한 지름의 탄피도 더러 있었다. 게다가 팔랑개비가 달린 박격포들, 불발탄들은 많았다. 단검도 어쩌다 주웠고, 총도 주웠다. 철모는 물론 군용 밥통이며 단검도 있었다. 애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쇠붙이를 찾아다니는 아저씨들이 우리 동네를 훑으며 지나다니기도 했다.
단검은 주우면 더덕 캐러 다니는 용으로, 철모는 물이나 음식 담는 용으로 사용했다. 쇠붙이들은 엿과 바꾸어 먹었다. 우리 역시 쇠붙이들을 열심히 보이는 대로 주워 모았다가 며칠 만에 한 번 동네를 도는 엿장수에게 엿과 바꿔먹기 위해서였다. 쇠붙이 가치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절렁거리는 가위소리를 내며 엿장수가 오면 그동안 모은 쇠붙이를 있는 대로 넘겨주고 엿을 받아 형제들이 나누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불발탄 박격포를 50여 개는 모은 것 같았다. 사랑방이지만 창고로 쓰는 방에 그걸 고스란히 모셔두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공부하던 형이 집에 돈을 마련하러 내려온 참이었다. 그 방에 박격포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위험하니 당장 가져다 버리라는 호랑이 같은 형의 명령에 할 수 없이 버려야 했다. 그렇다고 엿이 머리에 빙빙 도는데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해서 작은형과 둘이서 집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앞밭 한가운데에 있는 각담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옥수수 마른 섶으로 위장을 하고는 모른 척했다. 그러다 나중에 엿장수가 왔을 때 그리로 안내하여 엿과 바꾸어 먹었다.
큰형이 기겁을 한 이유는 충분했다. 당시에 폭발사고가 더러 있었다. 아이들이 팔랑개비를 분해하려고 돌로 두드리다 팔랑개비가 돌면서 폭발하여 부상을 입는 일도,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것을 불 속에 굽다가 폭발하여 부상을 입는 일도 있었으니까.
그만큼 격전지이기도 했을 곳, 너무 높아 전쟁 초기엔 군인들이 지나가지도 않다가 중공군의 개입이 있은 후 드러난 동네에 내가 살았다. 돌아보면 나도 무지의 시절이었다. 너무 철이 없었다. 백우산에 오르면 여기저기 풀이 유난히 웃자란 곳들이 있었다. 거기엔 여지없이 해골바가지들이 있었다. 풀들이 시체를 거름 삼아 잘 자라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공군이 후퇴할 때 유엔군이 숨어 있는 적군을 내쫓기 위해 휘발유를 뿌리고 백우산에 불을 질렀다 했다. 필시 그들의 해골이었을 것이다. 해골들을 보면 그걸 주워서 비탈에 굴렸다. 그러면 굴러가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너무 철없는 짓이었다.
지금도 그때 한 행동들이 죄스럽다. 몇 개나 굴렸는지 모른다만, 지금 같으면 좋은 자리 찾아 묻어 주었을 터인데, 철없는 짓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지금 나에 비하면 아주 어린 애들이었을 그분들, 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우리를 욕했으랴. 그걸 가지고 누구 것이 더 멀리 내려가나 시합을 했으니, 벌 받을 짓을 했다. 그렇다고 용서를 빌 길이 잆으니 무지한 탓으로 돌리련다. 무지도 죄는 죄다. 조금은 덜하겠지만.
그때에 비하면 나는 미꾸라지 용 된 셈이다. 어렸지만 산 무서운 줄 모르고 다니며, 전쟁놀이를 즐기던 어린 시절, 머언 먼 동화처럼 정겹긴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날들이다. 그때 함께 산을 쏘다니며 놀던 친구들과 함께 그 산에는 다시 가고 싶다. 등산로를 지나가면서 그분들의 명복이나마 빌면서 죄를 고하고 싶다.
코로나19 빨리 지났으면 좋겠다. 나보다 한참 위지만 같은 경험을 한 형님과 점심이라도 함께 나눌 날을 잡기 위하여.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만큼 그 시절은 멀리 가고, 나는 좀 더 나이 들어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