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0- 비가 오면 생각나는 풍경들

영광도서 0 462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으로 시작하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여기까지 쓰면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겠지만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는 비가 오면 그때 그 사람이 생각날 테고 누군가는 비가 오면 다른 그 무엇이 생각날 테지만, 나는 비가 오면 초가집에서 생활하던 날이 떠오른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그 해가 언제였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만, 분명한 건 어느 해 겨울, 우리 마을의 집들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붕개량사업이었다. 새로 집을 지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 있던 집에 지붕만 초가지붕에서 함석이나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지붕만 바뀌었지만, 마을의 모습은 달라도 아주 달랐다. 어느 집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지붕개량을 하여 그때부터 초가집은 구경할 수 없었으니, 마치 몸은 그대로지만 얼굴만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갖다 붙인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의 집으로 모두 탈바꿈했다.

 

그 전에 초가집들은 지붕도 지붕이지만 구조자체가 대단한 목수가 지은 것이 아니라 목수 한 명에 보주 목사 정도, 나머지는 마을 장정들이 도와주거나 집 주인이 거들어서 집을 지었다. 집에 들어갈 재료는 모두 마을에서 구했다. 국유림이 거의 전부였는지라, 집을 지으려면 몰래 목재를 구해야 했다. 미리 산 속에 들어가 기둥이 될 만한 나무들을 소용될 수만큼 톱으로 잘라서 숲에 감추었다. 기둥을 세운 다음에 벽을 치기 위해 들어갈 죽때끼, 벽을 세우면 그 위에 올라갈 천정용 대들보며 목재들, 게다가 경사를 만들어야 하는 지붕을 만들기 위한 서까래 용 목재들까지 모두 국유림에서 몰래 베고 잘라서 감추어 두었다가 어느 정도 마르고 생나무가 아닌 느낌을 줄 때까지 감추었다가 그걸로 집을 지었다.

 

집 지을 목재를 감춘 이유는 산림간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생나무를 잘랐다가 걸리면 큰 문제였으나 이미 마른 목재는 어디서 잘랐는지 근거를 추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림간수는 묵인하고 넘어갔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지만 소위 지옥의 사자 같은 산림간수에게만 안 들키면 되었다. 가끔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는 산림간수, 오토바이 소리만 들리면 마을에선 모두 초긴장이었다. 어느 집 치고 나무를 베지 않고는 살 수 없었으니 법에 걸리지 않을 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산림간수만 오면 마을에선 반장이나 마을 우지들이 모여 평소엔 맛도 못 보는 닭을 잡아서 접대를 하곤 했다.

 

그렇게 완성한 집이 초가집이었다. 벽은 기둥과 기둥의 위 아래로 기둥 굵기보다 조금 가는 나무를 연결한 다음, 윗나무와 아랫나무를 통송곳으로 서로 일정하게 구멍을 뚫고, 구멍마다에 벽을 지탱하도록 매출한 나무들을 세운다. 그렇게 벽은 골조를 갖춘다. 거기에 의지하여 수숫대나 싸리나무들을 엮어서 벽 모양을 얼추 갖춘다. 소위 바람이 숭숭 새는 벽쯤이다. 그 다음에 황토를 구해다가 거기에 볏짚이나 풀을 베어 잘게 쏠아서 물과 섞으면 제법 접착력이 있는 재료로 변한다. 그걸로 흙벽을 완성한다. 천정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만든 다음, 그 위에 서까래들을 세로로 빗물이 잘 흐르도록 경사를 지게 만들어 얼추 얼개를 짜고 가로축으로 중간 중간 발 디딜 만큼 지지대로 지붕의 골조를 갖춘다. 그 위에 볏짚이나 억새로 이엉을 엮어 덮으면 초가집은 완성이다.

 

해마다 초가지붕엔 벽을 타고 올라간 호박이나 박이 꽃을 피웠다. 특히 박꽃은 달밤이면 하얀 몸매를 자랑했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아름다웠다. 가을이면 지붕에는 여기 저기 큼지막한 호박이 자리 잡았고, 하얀 박들이 자리 잡았다. 늦가을이면 파란 잎들이 사라지고 여기 저기 얽힌 줄기에 달린 하얀 박들이 뒹구는 듯 멋진 풍경을 연출했다.

 

이런 낭만적인 모습과 달리 곤란한 건 지붕이었다. 논농사를 짓는 이들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었고, 그렇지 않은 집들은 억새를 여름에 베어 말렸다가 그걸로 이엉을 엮어야 했다. 억새는 자칫하면 손에 상처를 내었다. 이엉은 일과가 끝난 다음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돌아가며 품앗이로 엮었다. 하룻밤씩 한 집 한 집 돌아가며 품앗이로 이엉을 마련했고, 어느 날을 받아 낮에 지붕을 덮었다.

 

문제는 여름이었다. 초가집은, 특히 억새로 덮은 집은 비가 줄줄 새는 때가 많았다. 자분자분 내리는 비에는 지붕의 짚들이 차분하게 가라앉도록 서서히 젖어들어 문제가 없었지만, 소나기처럼 갑작스레 내리는 비는 지붕을 뚫고 들어와 천정을 적시며 방바닥으로 줄줄 새어 내렸다. 그럴 때면 그릇이라면 그릇을 있는 대로 가져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놓았다. 방바닥에는 세숫대야며 밥그릇이여, 양은 용기들이 여기 저기 놓였다. 그렇게 지켜보다 그릇마다 물이 차기 전에 밖으로 버리는 웃지 못할 진풍경이 벌어졌다. 밖에는 지시랑물이 지붕 색을 안고 떨어지면서 봉당 아래 마당에 작은 구멍들을 팠다. 어린 마음에는 정겨운 풍경일 수 있었고 놀이일 수 있었지만, 어른들에겐 비참한 일이었으리라.

 

그랬던 진풍경들이 어느 순간 동화처럼 먼 일이 되었으니 지붕개량 사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어느 때쯤, 정부에서 일정액을 지원하여 개량 사업을 일제히 했다. 무조건 해야 하는 것으로 어른들은 알았다. 때문에 초가집은 한 집도 예외 없이 사라졌다. 집의 기본골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지붕의 골조는 필연적으로 바뀌었다. 매출한 낙엽송 서까래는 지붕에서 쫓겨났다. 그 자리를 각구목들이 차지했다. 지원액의 기준이 함석이었는지, 대부분 집들은 함석으로 지붕을 덮었고, 교회 사택만 슬레이트로 덮었다. 그렇게 완성한 집, 여름에도 하등 비가 샐 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이엉을 엮을 일도 없었다. 어쩌다 몇 해에 한 번 지붕에 페인트칠을 하면 되었다. 다만 여름에 비가 올 때는 유난스럽게 함석지붕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에 비해 슬레이트 지붕은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 후로 초가집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어쩌다 여행 중에 초가집을 보면 늘 생각난다. 지붕 위에 피던 하얀 박꽃들이 달빛을 받아 곱던 풍경이며, 가을에 접어들면 검붉게 변한 지붕들이 드러나고, 그 위에 뒹구는 듯 줄줄이 매달린 호박들이며 하얀 박들이 여유롭게 햇살을 받는 풍경들이 동화처럼 떠오른다. 그와 아울러 구슬픈 풍경은 역시 비가 오면 생각나는 풍경이다. 집 밖 봉당 아래에 떨어지는 지시랑물들이 만들어내는 개미귀신 집 같은 작은 구멍들, 천정 사이로 뚝뚝 떨어지던 빗물들, 그걸 퍼내느라 긴장하던 엄마와 아버지, 빗물을 피해 요리 조리 움직이며 안전지대를 찾으며 깔깔거리던 철없던 시절의 나의 모습이 내가 아닌 다른 촌티 뚝뚝 떨어지는 아이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엄마 그리고 아버지,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 비참하다면 비참하겠지만 하루 체험 정도는 해보고 싶을 만큼 동화와 같은 그 날이 하루쯤만 그립다. 비가 오는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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