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1- 사기를 쳐서 재무시 트럭 타던 날

영광도서 0 486

어릴 적엔 동네에서 자동차 구경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면소재지인 도관리에서 우리 마을에 오려면 까마득한 고개,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도로가 있었으나 군사용 비상도로만 있었다. 군용 도우저가 작전용으로 밀어서 일 차선으로 간신히 만든 도로인데다 비포장, 게다가 급경사 지역이 많아 소위 재무시(나중에 안 것이지만 제너럴 모터카의 약자 GMC를 그렇게 불렀다.)만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것도 도관리 쪽에서는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 쪽 너머에 있는 두촌면 자은리에서 다름재를 넘어 탑동을 지나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쩌다 그 길로 크고 흰 별 마크가 차체에 달린 군용차나 투박한 재무시만 들어왔다. 군용차도 삼판 나무를 실어 날랐으니, 지금 생각하면 불법이었을 터였다. 그렇지 않으면 소위 재무시가 삼판 나무를 실어 날랐는데, 항상 조수가 따라다녔다. 조수가 하는 일 중 가장 기본적인 일은 차가 출발하기 전에 시동을 걸 때, 시동걸이용의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돌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려야 시동이 걸렸다. 때문에 재무시가 들어오면 운전사와 조수가 함께 들어왔고, 이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스타라고나 해야 할까.

 

이 신기한 물건, 이 놈은 얼마나 힘이 센지 웬만한 경사에도, 질펀한 길에도 바위투성이 길에도 괴물처럼 힘찬 소리를 내며 다녔다. 어쩌다 차가 한 번 들어오면 너무 신기해서 우리는 차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러면 가끔 조수한테 제지를 당하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도망했다가 즉시 또 따라가기도 했고 조수나 운전수가 볼 수 없게 뒤로 다가가 한참 매달려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한 번 매달리면 친구들에게 큰 자랑거리였다. 그러다 조수한테 잡히면 꿀밤 두어 대를 맞고는 쫓겨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차에 매달리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 번은 마음씨 착한 운전수의 배려였는지, 조수의 배려였는지 모르지만 친구들과 트럭에 타는 행운을 얻었다. 문제는 이 차는 우리 집과는 정반대쪽인 웃괘석으로 가는 차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는 집에서 10킬로미터 가까운 산이었다. 거기서부터 신작로를 따라 집에 왔을 때는 별이 잔뜩 내린 밤이었다. 당연히 엄마한테 단단히 혼이 났으나 그럼에도 기분은 좋았다. 물론 엄마가 혼 낸 이유는 걱정이라기보다 그날 뜯어왔어야 할 토끼먹이용 칡잎을 안 뜯어온 탓이었다.

 

차를 탄다, 그건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짐칸에 타는 일이었지만, 덜컹거려서 엉덩이가 깨질 정도로 아팠지만 아주 신나는 일이었고,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때문에 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길을 겨우 비켜서서 힘을 모아 “아저씨 차좀 태워주세요!”라고 합창을 하곤 했지만 거의 모든 트럭이 잘 태워주지 않았으니까.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때가 어느 철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5학년, 동생이 1학년 때, 동생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이라, 동생하고 동생과 같은 반 애들 둘, 하여 넷이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학교에서 300여 미터쯤 왔을까, 트럭이 굉음을 울리면서 굽이굽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차를 타고 싶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길 옆 산에 누군가 벤 소나무가 한 그루 쓰러져 있었다. 가지들이 성글게 그대로 남은 마른 나무였다. 혼자 끌어내기엔 힘이 벅찼다. 나보다 네 살이 어린 애들이지만 애들을 불러 함께 나무를 끌어다 신작로를 막았다. 잠시 후 괴물처럼 다부진 재무시 트럭이 굽이를 돌아 나무로 막아 놓은 곳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이걸 치우자고. 그렇게 하여 넷이서 다시 나무를 힘들여 끌어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조수가 내리더니 참 착한 학생이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걸로 끝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차를 아주 친절하게 태워주었을 뿐 아니라 타려면 높이 때문에 동생들은 내가 힘을 보태줘야 했는데, 조수가 손수 동생들을 번쩍 안아서 차에 태워주었다. 얼마나 신이 났던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트럭 뒤 칸에 타고 오면서 동생들에게 쉿 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집 근처 산에 까지 아주 신나게, 내일의 자랑 거리를 만들며 타고 왔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정직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 외에도 어른들을 골탕 먹인 일들이 더러 있었으니, 심성이 착하다는 건 어른들의 착각이었고, 나는 은근한 악동이었다. 그런 생각을 사기에 이용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어렸지만 늘 아버지께서 하곤 하신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엔 피눈물 나는 거야!”라는 말씀을 진리로 여긴 덕이었다. 생각은 고약하게 했으나 남한테 피해인지 아닌지는 어린 마음에도 판단은 했으니까. 난 여전히 “품행이 방정하고 타에 모범이 되므로 상장을 수여”받을 자격은 있었으니까.

 

그런 기분, 그때의 좋았던 기분 때문에 누군가 어려운 상황에 있는 걸 보면 난 제법 친절한 편이니, 그것도 속죄의 방법은 방법일 것이다. 참 이상도 하다. 거짓 행동을 한 걸 고백하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함을 넘어 신나는 것을 보니, 죄 짓고는 못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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