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2- 나는 다중성의 위선자

영광도서 0 490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란 노래 구절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 많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나를 잘 모른다. 이중적인 면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중적인 면이 내게 있다. 때로는 차가우면서도 때로는 따뜻하다. 때로는 이성적인데 때로는 감성적이다. 예를 들면 나는 잘 울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혼자 있을 때는 자주 운다.

 

심지어 요즘은 미스터 트롯을 들으면서 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음에도 사연에 울고, 분위기에 울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러다 보니 여럿이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도,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도 울지 않았지만 혼자 길을 걸을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런 걸 보면 울음이 내게 많고, 감성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있을 땐 덤덤하게 넘어가곤 한다. 내가 나를 모르겠다. 적어도 남을 많이 의식할 때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덤덤함을 유지한다. 어쩌면 거짓말 탐지기를 들이대도 내 속을 알아내지 못할 만큼 나는 이중적인 또는 다면적인 면을 가진 위선의 대가가 아닐까 한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길옆에 싸리나무로 엮은 커다란 채독이 있었는데, 친구들이 그것에 불을 붙여서 태워버렸다. 내가 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고 같이 즐겼으니 더 나쁜 짓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다. 그 집은 바로 신작로에서 30미터 거리에 있었는데, 아저씨가 혼을 내주려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겁을 먹은 아이들은 냅다 뛰었다. 뛰어야 벼룩일 것 같은 생각에 나는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아저씨가 다가오거나 말거나 앞으로 걸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도망가는 아이들을 따라 뛰었고, 나는 무사히 그 일을 넘겼다. 물론 붙잡힌 아이들은 꿀밤 몇 개씩 먹었다며 억울해 했다. 직접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도망가다 잡힌 아이들도 있었으니까.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강을 건너서 신작로 위로 산비탈을 오르면 무밭이 있었다. 배가 고플 때 무를 뽑아 바위에 내리쳐서 아랫부분은 버리고, 겉으로 드러난 녹색 부분만 먹었다. 녹색 부분은 달달하고 흰 부분은 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마침 그 길을 지나오는데 밭주인이 우리를 보자 혼내려고 달려왔다. 아이들은 잽싸게 도망을 쳤지만 나는 태연하게 아저씨가 달려올 때에도 멈추어 있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내 뒤로 도망치는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들이 달린 들 빨리 아저씨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을 터였으니, 잡힌 아이들은 혼쭐이 났다면서, 나도 혼 날 거라고 했지만 그것으로 더는 그 일은 내게 해를 주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나의 이중성을 넘은 다중적인 면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엔 선하고 좋은 인상을 준다만 실제로는 위선자임은 분명하다. 나의 이런 면을 감히 고백할 수 있는 걸 보면 나도 이제는 제법 나이들은 것 같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라지만 다른 한 편의 마음으로는 긍정적으로는 달관이라 하겠지만, 부정적으로는 마음을 내려놓은 그런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변한 것 같으니 변하지 않는 본능, 남들 앞에선 좋은 점만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위선적인 면이 여전히 남은 나, 때로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돕지만, 때로는 못 본 척 외면하는, 때로는 못 된 짓을 눈을 감거나 가담하는 나는 위선자이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새로운 나로 거듭나지 못하니,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내 안에는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있으니, 나도 그런 나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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