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5- 나의 아홉 살 인생

영광도서 0 486

천재는 평생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남보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얼핏 보면 무엇이든 뛰어난 것 같으나 엄밀히 살펴보면 특정한 범위에서만 뛰어나다. 게다가 일정 시기가 지나면 그다지 뚜렷하게 발전하지는 않는 게 대부분이다. 만일 내게 천재의 정의를 내리라면 위처럼 내릴 것이다.

 

특정한 시기, 인생에서도 그런 것 같다. 위기철의 <아홉 살 인생>의 주인공이 어쩌면 저리도 어른스러울까 싶듯이, 인생에서 아홉 살은 매우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야 잘 모르겠지만 나의 아홉 살, 당시에는 몰랐으나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내 인생의 밑그림은 아홉 살 때 모두 그린 것 같다.

 

아홉 살, 그 나이에 무얼 안다 싶겠지만 그때 나는 굉장히 철이 들었던 것 같다. 엄마 말씀이 우리 집안은 술로 망한 집이라 하기에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술을 마시지 않겠다, 너무 착한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악역을 하시니 엄마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 그때 마음먹었다. 나름 그 말씀대로 말 잘 듣는 아이 그리고 어른, 술 안 마시는 아이 그리고 절제 잘하는 어른으로 살았다. 그게 아홉 살 때 심겨진 내 삶의 개똥철학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홉 살, 무엇보다도 난 그때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는 공부하지 않겠다.”라고 내가 나에게 말했다. 그 말을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 잘 지켰다. 자부하건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박사과정까지 마쳤으니까. 아홉 상에 먹은 그 마음을 가끔 되뇌며 살았으니까. 결혼 후에 공부를 하면서는 최소한 월급만큼은 고스란히 아내에게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마음먹었고, 그걸 지켰다. 그렇다고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해서 내 용돈을 마련한 건 아니었다. 직장은 직장대로 다니고 근무시간 외에 다른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남들이 볼 때는 치열한 삶, 그럼에도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건 아홉 살 때 먹은 그 마음 덕분이었다.

 

개똥철학,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특별한 것이 자기 삶의 철학이라면 철학일 것이다. 철학이라 이름붙이면, 변하지 않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정의를 내리는 철학, 진리란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과거에도 그러하였다, 현재도 그러하다, 고로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란 전제를 두고 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는 있다. 그건 소수가 생각하는 인생의 본질이 무엇이냐, 인간이란 무엇이냐 그런 화두들일 테지만, 그보다 더 삶에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지탱하도록 돕는, 내가 나답게 살도록 돕는 마음의 부름이나 마음의 지시를 나는 삶에서 중요한 삶의 철학이라 생각한다.

 

삶의 철학은 거저 생기는 건 아니다. 어떤 계기가 그렇게 마음먹도록 만든다. 삶의 과정에서 어떤 특별한 일이 마음에 영향을 미쳐 때로는 부정적인 마음을 먹게 만들고, 때로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게 만든다.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 자란 아이들도 나중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삶의 상황이 안 좋아도 어떤 아이는 미꾸라지 용 되듯 잘 성장하는가 하면, 반대로 어떤 아이는 삶을 포기하듯 자라기도 한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였다. 나 여섯 살 때까지는 밥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나물죽이 전부였다. 엄청 큰 대야에 맷돌에 타갠 옥수수쌀 드문드문, 거의 전부는 나물뿐인 죽이 주식이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는 한 번도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조금 나아진 게 있다면 죽만이 주식이 아니라 하루 한 끼는 적어도 타갠 옥수수밥을 먹었다. 식은 다음엔 힘을 주어 숟가락을 꽂아야 가까스로 들어갈 만큼 딱딱한 밥을.

 

그 시절에 큰형은 공부에 무척 관심을 가졌다. 내 기억엔 없지만 동네 어른들 말로는 철봉대를 만들어놓고, 운동하기를 즐겼다고 했다. 부모님은 논이나 밭에 나가 일하거나 품삯을 받으러 남의 일을 하러 가거나 했음에도 거의 일을 하기보다 혼자 공부하거나 운동한다고 동네 어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소위 철딱서니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 청년이었다. 그랬던 큰형이 도시로 나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빈대 잡이 끼니를 이어가도 시원찮을 살림에 큰형을 지원하기는 쉽지 않았음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아주 작은 돈푼이라도 싹싹 긁혀야 하듯 하는 것은 분명했다. 세세하게는 몰랐지만 엄마와 아버지의 하소연을 나는 들어 알았다.

 

문제의 아홉 살 내 인생, 그때 마음먹은 게 “내가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도 난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는 공부하지 않을 거야.”라는 결심을 불러냈으니, 내 삶의 철학의 계기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진학 여부를 담임선생님이 조사할 때, 내가 중학교에 못 간다고 했을 때, 담임선생님은 당신이 모두 책임을 질 테니 입학절차를 밟으라고 했으나, 내가 포기한 것도 그 영향이었다.

 

위기철 선생의 <아홉 살 인생>의 주인공이 어른스럽듯이, 내 인생을 통틀어 내 아홉 살은 가장 철들었던 때였던 듯싶다. 그땐 참 어른스러웠고, 어른보다 기특한 마음을 가졌고, 어른 못지않게 행동했던 것 같다. 그때는 나는 어른스러움의 천재였다. 아마도 그때처럼 인생을 죽 살았다면 지금의 나는 못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폭망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물결 따라 변조하며 살다 보니 기특한 아이는 사라지고, 때로는 음흉한 어른으로 살았고, 때로는 철딱서니 없는 어른으로 살았다. 얼굴 두껍게 위선으로 살아가는 요령도 배웠다.

 

그리고 지금의 나, 나는 정의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철든 아이를 애어른이라고, 나이는 어른이어도 철딱서니 없는 어른을 어른애라고. 나, 나는 철딱서니 없는 어른애다. 그래도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철없는 어른인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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