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38- 부끄러운 편법의 본능

영광도서 0 470

가끔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을 생각한다. 머리에 입력된 것이 없어서일까, 살아온 과정 중에 가장 생생한 기억으로 남은 시절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겐 중고등학교 시절이 없는 때문일지 모르겠다. 모두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흑백영화의 장면들처럼 뚜렷하게 떠오른다. 해서 검색해 보니 지금은 학교 대신 캠핑장이 검색된다. 캠핑장으로 바뀌었나 싶다.

 

두촌면 괘석리에 학교가 있었다. 내가 사는 마을은 내촌면 광암리였다. 괘석리이긴 했지만 강 하나 건너면 바로 거기에 학교가 있었다. 산발치에 있어서 앞에는 강이 흘렀다. 제법 입지가 좋은 곳이라서 경치는 좋았다. 위쪽 다리를 건너서 학교에 들어가려면 학교 정문이고, 돌다리를 건너 가깝게 가면 쪽문이었다. 물론 문은 달려 있지 않았다.

 

정문에 들어서면서 운동장이 펼쳐졌고 제법 높다란 언덕 위에 학교 건물이 있었다. 검정색 송판들로 가로지른 모습이 특징인 목조건물이었다. 세 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정문으로 들어서서 건물을 마주하면, 맨 우측에 있는 교실엔 대부분 1학년교실이었고, 그 바로 옆 교실은 교무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조용한 반이 그 교실을 차지했다. 그 다음에 교무실이 있었다. 교무실 바로 좌측 교실이 하나, 이렇게 건문 하나는 구성되어 있었다. 중간에 건물은 주로 난로용 장작을 두던 창고였는데 그 건물에 교실 두 개, 학생 수가 유독 많았던 나보다 1년 선배들의 반은 한 학년이 140여 명이었고, 내 아래로 2년 후배들은 105명이었던지라 고실이 모자랐다. 해서 이들 학년은 반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에 그 동을 임시 교실로 꾸며 쓰기도 했다. 마지막 좌측 산울 가에 있는 건물은 신축 건물엔 교실 세 개가 있었다.

 

나는 이 건물들 중 맨 좌측 건물에서만 공부했다. 1학년 때엔 맨 좌측 교실, 2학년 때는 교무실 우측 교실, 3학년 때는 교무실 좌측교실, 4학년 때는 다시 교무실 우측 교실, 그리고 마지막 5학년과 6학년 때는 교무실 좌측 교실에서 공부했다. 우리 학년이 비교적 조용했거나 학생 수가 적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학년이 모범반이긴 했다.

 

목조건물의 학교, 교실도 온통 나무였다. 한 책상에 둘씩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교탁이 있고, 교탁 뒤 선에 맞춘 조금 높은 교단이 있었고, 교단 넓이만큼의 칠판이 앞 벽면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칠판 좌측 위 벽에는 급훈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를 담은 액자가 우측 위 벽엔 태극기를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특히 우리 학년이 주로 공부한 사무실 좌측 교실엔 태극기 아래로 평 반 가량의 도서관이랄까, 책 이백여 권 꽂힌 판자방 같은 자율 도서관이 있었다. 책이라야 200여 권이나 될까, 안 될까 그 정도였다. 학생 대표가 대출표를 작성하고 빌려주었다 받곤 하는 자율적인 도서관, 그 안에는 오렌지색의 계몽사 책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영실, 세종대왕 등의 위인전이라든가, 소공녀, 소공자 등의 축약본 고전, 괴도 루팡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이 전부였다. 그 안에 있는 도서는 한 권도 빠짐없이 모두 읽은 것 같다.

 

읽을거리라곤 그게 거의 전부였다. 거기에다 덧붙인다면 신문으로는 소년중앙일보, 월간지로는 어깨동무가 전부였다. 반마다 신문도 한 부, 어깨동무도 한 권뿐이어서 돌아가면서 읽었다. 신문에 연재만화 소년007, 어깨동무 부록으로 온 손오공, 구월산유격대가 참 재미있었다.

 

그 외엔 학교 가는 길 물굽이에 과자며, 학용품이며 일절 판매하는 가게에서 만화책도 취급했다. 빌리면 5원에 세 권, 구입하면 오원에 한 권이었다. 나는 교회에서 요절 외우기하면 선배들을 모두 합쳐도 항상 1등이었기 때문에 노트는 충분히 상을 받아서 썼다. 어쩌다 엄마한테 노트 값을 받으면 그걸로 만화책을 빌려서 읽었다. 만화책 참 많이 읽었다. 알파칸, 용감한 형제, 거대한 철인 등 그 집에 있는 만화는 거의 다 읽었다.

 

학교 공부는 단순했기 때문에 양이 많지 않았다. 당시엔 시험지가 어느 학교고 통일되어 있었다. 학력평가시험이란 제목이 달린 시험지가 교육청에서 내려왔다. 시험지에 보면 다른 아이들도 알았는지 모르지만, 시험지 상단에 출제범위 폐이지가 있었고, 다음 출제범위 페이지가 적혀 있었다. 나는 시험을 볼 때 다음 출제범위를 기억해 두었다가 시험 보기 전날 그 부분만 집중으로 공부했다. 덕분에 항상 시험을 거의 완벽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은 어느 선생님이든 수업시간에 나를 감시하는 적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빌려오거나 구입한 만화책을 공부하는 척하면서 책상 아래로 몰래 볼 수 있었다. 집에 가면 토끼풀이나 소꼴을 베러 다녀야 했으니까. 용케도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으니 나는 해마다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여”란 학생이었다.

 

이렇게 돌아보면 나는 본질적으로 착한 학생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편법이라면 편법, 요령이라면 요령, 사기라면 사기, 자칫 아주 잘못될 놈이었다. 다행인 건 도서관이 있는 교실에서 절반을 학교에 다니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는 것, 요절을 많이 외워 상을 받아 만화책을 많이 읽은 것, 그리고 상 받는 재미에 교회에 열심히 다닌 것이었다.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이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터였다.

 

책을 좋아한 건, 무엇이든 읽기를 좋아한 건 타고난 건지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다만 어린 시절의 독서가 나를 작가로 만들어준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에야 만화책이든 무슨 책이든 일단 많이 읽는 게 좋지 않으랴. 종이와 가까워지면, 나중에 어른이 되면 책과 가까이 할 테니까. 참 다행이다. 내가 사기꾼이 안 된 것이. 정치인이 안 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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