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0- “라때”의 선생님들은!

영광도서 0 483

“라때”란 말이 있다. “나 때는 말이야”의 준 말이란다. 어느 특정지역에서 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그런 특성이 있나 싶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언제나 ‘그때가 지금보다 나았다’, ‘그때가 지금보다 좋았다’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건 인류보편의 모습인 것 같다. 누구의 작품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프랑스어를 공부할 때 산문 중에 “De mon temps, de mon temps"이란 제목이 있었으니, 이것 역시 우리말로 옮기면 ”나 때는“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인 즉, 도봉문화원에 수필 강의를 나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의외로 어르신들이 많았다.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회장 어른이 “차렷!”하셨다. 이어서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하셨다. 그러자 회장의 구호에 따라 수강하는 어른들 모두 큼 목소리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했다. 수업이 끝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사만 “선생님 고맙습니다.”로 달랐을 뿐이다.

 

지금이야 많이 뻔뻔해져서 무던하게 넘어가지만, 그때만 해도 나보다 연배가 위인 어른들 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형식상으로는 선생과 제자 사이라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개별적으로 할 말이 있을 때거나 개인적인 질문을 하면 그 분의 책상으로 다가가서 말씀을 듣곤 했다. 한 번은 K어른 옆으로 말씀을 나누러 갔다. 그런데 그 분이 갑자기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서셨다. 너무 무안해서 “그냥 앉아 계세요!”라고 말씀을 드려도 “엄연히 선생님이신데 예의가 아니지요”하셨다. 그 후에도 그 분은 늘 같은 모습이셨다.

 

처음 도봉문화원 왔을 때부터 두세 해 동안 매주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고 끝냈다. 어느 순간 임원들이 바뀌면서, 보다 수강하는 분들이 젊어지면서 그런 문화는 사라졌는데, 소위 “라때” 초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매주 월요일이면 애향단 별로 동네 어귀에서 평소보다 학교로 일찍 모여들었다. 그러면 책보를 얼른 교실에 두고 운동장에 집결했다. 전교생이 모두 모인 가운데 주례 모임이 있었고, 국기계양식을 시작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이어서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구호에 따른 “재건체조 시작”이란 멋진 소리와 함께 체조를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앞줄에 나와서 우리를 향해 서서 시범을 보이듯 체조를 했고, 우리 모두 구호에 맞춰 체조를 했다. 교감선생님의 사회에 따라 절차는 진행되었고, 교장선생님의 훈시는 이어졌다. 소위 나때는 저학년일 때는 허만은 교장선생님에 이어 고학년 때는 김동희 교장선생님이었다. 이 절차가 끝나면 그제야 학생들은 각기 각반 교실로 헤어져 들어갔다.

 

운동장에서의 전체 모임은 매주 월요일 아침에 있었고, 토요일 열두시에 하교 모임이 있었다. 토요일엔 하교라서 재건체조는 없었다. 교장선생님 훈시는 필수였다. 헤칠 때는 늘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분쇄하자 적화야욕”을 외치며 끝났고, 그대로 헤어지는 게 아니라 각 애향단 별로 차례대로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교문은 나섰다.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애향단장인 6학년 선배의 지시에 따라 “조국 통일 위해서”라든가, “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로 시작하는 군가를 부르며 애향단 별로 학교를 벗어날 때까지 행진했다.

 

방향을 바꿔 학년별 수업 장면으로 돌려보면, 매일 아침 수업의 시작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은 반장의 구호로 시작했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 교탁을 앞에 두고 서시면 반장이 “차렷”에 이어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구호를 외쳤고 우리는 모두 구호에 맞춰 인사를 올렸다.

 

“간첩신고는 113”이란 포스터 그림에 붉은 늑대가 그려져 있어서 간첩은 사람이 아니라 늑대로 믿었던 때였으니, 선생님은 당연히 신과 같은 존재였다. 누가 감히 선생님의 말씀에 대꾸를 하며, 누가 감히 선생님이 계신데 떠들까. 선생님은 똥도 안 싸고, 오줌도 안 싸는 줄 알았으니까. 절대지존처럼 보이던 선생님들, 그래도 나 때는 선생님이 일어서라면 일어설 뿐 자동적으로 벌떡 일어서서 선생님을 맞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보다 윗대인 어른들은 아마도 선생님 대하기를 우리보다 훨씬 엄하게 대한 듯싶었다.

 

선생님이 원산폭격을 시키면 원산폭격 벌을 달게 받았다. 학생들 전체 책상 위에 올라서라면 올라섰고, 다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아도 누구 하나 반항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절대 권위였다. 신기하기만 한 선생님들, 무지해서였는지는 몰라도 내 기억에 나쁜 선생님은 한 분도 안 계셨다. 모두가 선생님다운 선생님이셨고, 지존 같은 분들이셨다.

 

엄마처럼 아빠처럼 사랑을 듬뿍 부어주신 것 같은 기억밖에 없다. 어쩌다 다치면 고무실로 데려가 빨간 물약을 발라주셨다. 어쩌다 불러서 위로를 하시는 선생님도 계셨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아끼셨다. “너 같은 놈이 중학교에 안 가면 대한민국에 누가 중학교에 가겠니. 무조건 진학할 아이들하고 사진 찍으러 가라.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 그렇게 말씀하실 만큼 나때의 선생님들은 인간애를 갖고 계셨다.

 

그에 비하면 나는 비록 그런 선생님은 아니지만 뭔가를 가르치긴 하니 선생은 선생이다. 나때의 선생님들은 천사와 같다면 나는 추락한 천사랄까, 양의 탈을 쓴 이라와 같다 할까, 지식으로만 선생이지 삶의 선생은 되지 못한다. 그럴 듯한 가면을 쓰고 그때그때를 넘기는 그야말로 삯꾼일 뿐이다. 세상에 살면서 누군가에겐 선생다운 선생 한 번 해 보았으면 싶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내겐 그때의 선생님들의 모습이 지존처럼 떠오른다. 서만석, 김성옥, 우종석, 홍광기, 이인재, 김숙자 그리고 석관식, 나를 스쳐간 1학년 때부터 반년 또는 일 년 길게 이 년 동안 선생님이셨던 분들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게 기억하련다. 나때의 선생님은 모두 참 인간다운 선생님, 인간애가 충만한 선생님, 지존 같은 선생님, 심지어 오줌이나 똥도 안 싸지는 않아도 우리와는 다른 선생님으로 기억하련다. 지금도 벚나무 아래에 줄지어 서서 중학교 진학자를 최종 점검 받던 그 순간이 생생하고, 선생님이 내게 하신 그 말씀이 귀에 울리는 듯하다. “너 같은 놈이 중학교에 안 가면 대한민국에 누가 중학교에 가겠니. 무조건 진학할 아이들하고 사진 찍으러 가라.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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