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1- “라때”의 우리들은!

영광도서 0 440

동시대를 살다, 이 말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여러 의미를 함의한다. 유사한 환경에 살았다, 비슷한 정서를 가졌다, 관습이 그러했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러했으며, 사람들의 마음 또한 그러했다는 의미와 통한다. 물론 어쩌다 별종이라면 별종, 아니면 좀 특이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첫 구절처럼 환경이든 삶의 패턴이든 사람들의 정서든 고만고만한 동시대를 살아왔음을 의미하는 말이 ‘동시대를 살다’의 뜻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어떤 정서와 환경에 있을까, 짐작이 잘 안 간다. 돌이켜보면 내가 교생실습한 때도 수십 년이 흘렀으니, 초등학교 다니던 때야 말해 무엇 하랴!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과 교생 실습할 때 만난 학생들의 차이는 격세지감이었다.

 

학교 선생님이 된다는 부푼 꿈을 안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학교에 교생으로 나갔다. 여선생님이 오기를 고대하던 고교 학생들은 내가 등장하자 학생들은 ‘우우’ 야유부터 발했다. 그렇다고 섭섭하지는 않았다. 통과의례라 생각했다. 그런데 청소 감독을 하면서 약간의 충격을 느꼈다. 그야말로 ‘라때’와는 달리 학생들은 몇 명씩 분업하듯 청소를 했다. 유리창 닦는 학생들, 바닥 닦는 학생들, 교실 정리하는 아이들로 나뉘어 청소를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아직 바닥청소를 맡은 학생들은 걸레질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학생들은 집으로 가려는 거였다. 그들을 불러 세우고 이유를 물었더니, 자신들이 할 것은 다했기 때문에 간다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를 경험하지 못한 내가 잘 몰라서 그런가 싶었다. 그럼에도 바닥 청소하는 학생들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가라고 잡았다. 대신에 나도 마포를 들고 청소를 도왔다. 한 달 동안 나는 매번 바닥 청소를 도왔다. 어쩌면 지금은 내가 교생 실습할 때와는 많이 달라져서 학생들이 청소를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교사자격을 얻었으나 교사로 근무한 적은 없으니까.

 

라때는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지금과는 달라도 아주 달랐다. 선생님들은 사람이 아니라 별나라에서 온 이들로 생각한 것은 당연했고, 고사리 손 같은 아이들이 학교 일도 참 많이 했다.

 

학급에서는 분단별로 분단장이 있었고, 생활부장이니 미화부장이니 해서 부장들이 있었고, 급장이 있었다. 급장은 아침에 수업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차렷, 경례 구호를 외쳤다. 아이들은 급장의 구호에 따라 “안녕하십니까?”로 수업을 열었고, “고맙습니다.”로 수업을 마쳤다. 또래의 아이들이긴 하지만 생활부장은 생활부장대로, 미화부장은 미화부장대로 선생님의 지시를 받들어 아이들을 지휘하여 여러 일들을 했다.

 

우선 미화부장의 역할은 교실을 꾸미거나 교실 안에 대한 일을 지시받아 했다. 그 중에 가장 뚜렷한 일은 교실 안 청소였다. 교실은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청소를 잘하려면, 그리고 마룻바닥이 부패하지 않게 하려면 매끌매끌하게 해야 했다. 해서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들기름이나 양초를 가져왔다. 들기름으로 바닥을 바르면 바닥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 위에다 초를 질하고 걸레나 헝겊으로 잘 문지르면 매끌매끌했다. 아주 잘 문지르면 자칫 미끄러지기도 했다. 때문에 장난이 심한 아이는 선생님이 드나드는 앞문에서 교탁을 올려놓은 교단 사이를 아주 미끄럽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이런 일은 어쩌다 한 번 전체가 모여서 했고, 바닥청소는 분단별로 당번이 정하여 매일했고, 토요일엔 전 학년이 유리창까지 닦곤 했다.

 

교실 밖 화단 정리도 우리들 몫이었다. 판자로 둘러쳐진 학교건물 앞, 각 교실 앞에는 화단이 죽 이어져 있었다. 창문을 열면 바로 바깥 밑으로 철따라 여러 꽃이 피었다. 화단의 경계는 돌이나 껍질 벗겨 흰 싸리나무를 반원모양으로 구부려서 이어서 꼽아서 모양을 내었다. 화단 가꾸기도 우리들 몫이었다. 우리는 화단을 가꾸기 위해 학교 앞 강가에 나가 자갈을 날라 와야 했다. 특별한 운반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 책보에 자갈을 담아 날랐다. 어쩌다 화단 정리를 하다 선생님 말씀대로 잘 못하거나 소동이 일면 단체로 기합을 받았다. 어리긴 했으나 자갈을 깔아놓은 화단에 원산폭격이란 벌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등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선생님의 권위는 우리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절대적이었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은 화장실 청소였다. 시멘트 다리를 건너면 정문 쪽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교문에 들어서기 전에 우측으로 20여 미터 쯤에 큰 관사, 그 위쪽에 소사 아저씨 집, 그 위에 또 다른 관사가 하나 있었다. 관사에서 중간쯤 관사에서 언덕 위에 있는 길로 곧장 오면 학교인데, 그곳에 화장실이 있었다. 남자화장실은 오줌이 흐르는 봇도랑 같은 것이 있었고, 똥통엔 똥물이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하얀 구더기가 들끓었다. 그놈들을 죽이려면 그때는 살충제도 없었는지, 선생님은 우리에게 할미꽃 뿌리를 캐 오게 시키거나 옻나무 비슷한 핸경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껍질을 벗겨오게 시켰다. 이것들을 짓찧어 오줌통이나 똥통에 담그면 구더기들은 잘도 죽었다.

 

그때는 그랬다. 이 모든 일들은 당연히 우리 아이들이 해야 할 일로 여겼다. 단체로 기합을 주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걸로 알았다. 그렇다고 그걸 시시콜콜하게 집에 가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게 관습이었고, 법이었다. 어른들의 정서 역시 그랬다. 선생님들의 권위는 지금으로 보면 신만큼이나 권위가 있었다. 모두가 그러했으므로 불만이 없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은 모두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선생님들은 섭섭할 테지만, 동시대를 살아온 우리 또래는 누구든 그때 선생님들이 지금의 선생님들보다 훨씬 인격적으로 훌륭했다, 인간다웠다, 스승의 날 노래처럼 참스승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대부분 대가족제도였기에 어느 가정이든 어른과 아이의 상하구분이 뚜렷한데다 늘 군사부일체를 학습 받았으니 그러했고, 선생님들 역시 사명감으로 아이들을 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집단을 개인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시대였으므로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정서는 고만고만한 터였으리라. 추억하노니, 당시의 선생님들의 인자하면서도 무서운 얼굴들이 무척이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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