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2- 노랗고 작은 땅벌들의 반란

영광도서 0 517

농담 삼아 하는 말들 중에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란 말이 있다. 겉으로는 남 좋은 일은 괜히 싫고, 남 나쁜 일을 보면 겉으론 위로하는 척 속으로는 즐기는 심술궂은 마음을 말한다. 사람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딱히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만 어렸을 적엔 남을 곯리는 게 재미있긴 했다.

 

시골에 살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땅벌에 쏘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땅벌을 동네 어른들은 땡삐라 불렀고 나 역시 그렇게 알았다. 말벌보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가장 지독한 놈들이 땅벌이다. 이놈들은 한 번 덤벼들기 시작하면 떼를 지어 덤벼든다. 다른 벌들은 도망치다 엎드리면 위에서 윙윙거리다 사라지는데, 이놈들은 엎드려도 저공비행을 하면서 덤벼든다. 때문에 자칫하면 한두 방 쏘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수십 방을 쏘이기가 다반사다. 게다가 이놈들은 집을 보이는 곳에 짓지 않는다. 땅속에 짓는데다가 구멍이 보일 듯 말 듯 작게 내기 때문에 벌집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발견한 후에는 구멍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모르기 때문에 우연히 건드려야 벌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벌들과 마찬가지로 땅벌도 굴 입구에 두 마리가 꼭 보초를 선다.

 

이왕 벌 이야기가 나왔으니, 흙벽에 붙어살면서 앵앵 거리는 나나니란 벌은 거의 쏘지 않는다. 나뭇가지에 집을 붙여 짓는 바다리란 놈은 쏘긴 쏘지만 얼른 엎드리면 놈들은 저공비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엎드려 기다리면 화를 면할 수 있다. 말벌이라고도 하고 왕태라고도 하는 큰 벌은 아주 무섭다. 이 놈들은 땅 속에 집을 짓는 놈들이 있고 나무에 마치 큰 바가지 매달린 것처럼 집을 짓고 사는 놈들, 두 종류인데 건드리지 않으면 쏘지 않기 때문에 조심만 하면 괜찮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벌이 있다면 검고 미련하게 생긴 호박벌이다. 호박벌은 웬만해선 쏘지 않는다. 손가락이라도 부딪혀야 쏘거나 한다. 그런데 이 벌은 주로 혼자 날아다니는데, 잘 살펴보면 조그만 땅굴로 들어가는 때가 있다. 그건 여지없이 호박벌의 집이다. 그 집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가을이 오기 전에 비 오는 날쯤 잘 날지 못할 때 삽으로 얼른 굴 주변을 파헤쳐 벌집을 끄집어내면 그 안에는 꿀 담긴 작은집들을 만날 수 있다. 씹으면 달달한 꿀맛을 볼 수 있는 벌레집 같이 생긴 것들이 있고, 생긴 모양은 같으나 씹으면 짭조름하면 그건 벌의 애벌레집들이다.

 

가장 많이 쏘이는 벌이라면 단연 땅벌이다. 다른 벌보다 땅벌은 떼를 지어 공격한다. 물론 건드리지 않으면 문제가 없으나, 잘 모르고 벌집 주변을 밟아서 울렸거나 잘못 지나치다 걸리면 떼로 몰려나온다. 작고 노란 놈들이 몰려나오는 장면은 볼만하다.

 

이 놈들에 쏘여서 눈두덩이 퉁퉁 부은 모습으로 학교에 오는 친구들은 왕왕 있었다. 친구들 중에 한 친구는 하필 거시기에 쏘여서 소변을 못 봐서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철이 없어서 그렇기도 했거니와 땅벌 집을 발견하면 학교 오가는 길에 돌을 주변에 던져놓고 구경하곤 했다. 조용하다가 돌 하나만 던져도 작고 노란 놈들이 앵앵이 아니라 우우웅하면서 몰려나오는 장관을 구경하는 재미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뒤에 오거나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지나가다 쏘여서 따가워하는 걸 구경하고 싶어서 건드리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만.

 

한 번은 나보다 2년 선배인 옆집 윤구형하고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학교 가는 신작로 옆 만석이네 논두렁에 땅벌집이 있었다. 우리 동네의 논들은 다랑논들이라 논두렁 높이가 보통 1-2미터 되는 것들이 많았다. 바로 신작로 옆에 땅벌 집이 있어서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돌을 던져서 구경하곤 냅다 도망하곤 했다. 그러니 벌들이 항상 잔뜩 긴장하고 있을 터였다.

 

그날 그 형과 나는 책보를 메었고, 그때는 학교에서 쓸 도구가 있다면 각자 집에서 가져가곤 했는데 그 형은 한 손에는 학교에 내야 할 수수로 만든 비를 들고 있다가 그 비를 나에게 잠깐 들고 있으란다. 그리고는 막대기를 하나 주워들더니 땅벌 집으로 다가가는 거였다. 저만큼 뒤에 여자 아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딴에는 그 아이들 놀라게 하려고 벌집을 쑤실 모양이었다. 한 번 쑤셔놓으면 놈들은 신작로로 확 나와서 지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상관없이 쏘아대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쏘여서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는 걸 보고 싶어서 아이들이 장난을 하곤 했는데, 형도 그걸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겁이 나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고 그 형은 벌집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 형이 “앗 따거 따거!”하면서 막대기는 팽개치고 양손으로 얼굴 주변에 벌들이 덤벼들지 못하도록 양팔을 마구 휘둘러대면서 냅다 달렸다. 그날 그 형은 꽤 많이 얼굴이 퉁퉁 부었고, 특히 눈덩이는 벌겋게 부어올랐다. 해서 형은 학교 가는 걸 포기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앞에 간 아이들이 바로 전에 벌집을 쑤시고 도망간 걸 모르고 형이 다가갔으니 제대로 옴팡지게 당하고 말았다.

 

남을 곯려 먹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만 알았지, 자칫 장난으로 한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몰랐던 시절, 이런 저런 사고도 많이 쳤던 아이들이 꽤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자칫 끔찍한 결과를 나을 수도 있었던 일들이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엔 피눈물이 나온다.”는 진리를 그날 그 형은 그대로 돌려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깨달은 건 아니었으니, 지금을 살고 있는 아이들 중에도 간혹 우리를 닮은 아이들이 여전히 있으니, 무섭기도 하다. 어렸을 적에도 착했던 형이었고, 나이 들어서도 훌륭한 사회인으로 잘 성장해서 살았으니, 어린 시절 한때의 장난들은 애교로 봐줄 만도 할 것 같지만, 모르고 한 짓이라도 가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들을 보면 어린 시절 했던 일들이 지금엔 아찔하기도 하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게 어린아이들이라도, 장난이라고 모든 죄를 면죄 받는 게 아니라는 걸, 지혜롭게 알려줄 수 있을까, 인간의 마음가짐, 쉽지 않다. 우리 모두는 운 좋은 죄인이었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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