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3- 이럴 때 미치고 환장하는 것일 터

영광도서 0 456

시골생활하면서 벌한테 한두 방 쏘이는 건 누구에게나 다반사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런 일은 사건도 아니고 거의 일상과 같아서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떤 특별한 일만 기억에 남는다.

 

수많이 벌과의 싸움들 중에 이야기 거리는 안 되고 단편적으로 남는 일들은 꽤 있었다. 나뭇가지에 지은 벌집 정도는 비 오는 날 나무막대기를 가져다 쉽게 떼어버리곤 했다. 말벌집이라도 비 오는 날은 놈들이 잘 날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떼어 버렸다. 나뭇가지에 집을 짓는 벌들은 바닥에 집이 떨어지고 좀 부서지면 한참 앵앵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역시 문제는 땅벌 집이었다. 땅속에 집을 지었으니, 쉽게 제거할 수 없었다. 방법으로는 비 안 올 때는 말린 섶을 가져다 벌집 입구를 막고 불을 놓는 것이었다. 연기를 피우면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릴 때 재빠르게 삽으로 푹 파서 내던지는 방법이었다. 보다 안전한 방법은 비 오는 날 파 버리는 게 쉬웠다. 비 오는 날은 놈들이 드나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흙을 잘 이겨서 벌집 구멍을 갑자기 막은 다음, 삽으로 주변을 깊이 파서 던지면 쉽게 파낼 수 있었다. 놈들은 집을 깊이 짓지 않아서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파낸 집을 보면 7층이 넘는 집도 있었는데, 굼벵이처럼 흰 번데기들만 가득했지 꿀은 전혀 없었다. 아마도 시골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정도의 기억은 모두 있을 것이다.

 

벌에게 쏘이다,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많이 쏘인 날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끔 벌한테 쏘여 죽은 이들 중엔 혹시 혈압이 오른 때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당시엔 아이들도 학교에 다녀왔다고 놀기보다 부모님 일을 도왔다. 토끼풀을 뜯어온다거나 소꼴을 베어온다거나 뽕을 따온다거나 했다. 비록 몸은 작고 어렸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제법 잘들 했다.

 

일 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누에를 쳤는데, 누에에게 줄 뽕은 산에 가서 구해야 했다. 항상 다음날 하루치 뽕은 미리 구해 놓아야 했다. 그날 아버지는 집에서 1킬로미터 되는 거리에 있는 논에 두렁을 깎으러 가셨다. 우리 소유는 아니었고, 황씨 집 시제음식을 차려주는 조건으로 경작하는 논이었다. 그 논 맞은편 산인 백우산으로 작은형과 뽕을 따러 오르는 중이었다. 뚜렷한 길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어쩌다 약초를 채취하거나 꼴을 베러 다녀서 어렴풋이 난 길로 오르는 중이었는데 붉나무 붕태가 제법 많이 달린 것을 보았다. 일종의 벌레집인데 그것은 따다가 삶아서 말려서 장에 가서 팔 수 있는 약재였다. 이상하긴 했다. 사람들이 제법 지나다녔을 텐데 그걸 따지 않은 게 이상하긴 했지만 기분 좋게 작은형과 나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기면서 그것을 따서 다래끼에 담았다.

 

그렇게 따다가 발목 부근이 따끔 하는 걸 느꼈다. 벌집이 있음을 직감한 나는 재빨리 벌집임을 외치며 옆으로 냅다 달렸다. 이어서 와앙하는 소리와 함께 샛노란 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볼만 했다. 나는 재빨리 도망쳐서 땅에 엎드린 덕분에 한 방으로 무사했다. 문제는 작은형이었다. 따갑다고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차라리 나처럼 엎드렸으면 좋았으련만 팔을 휘저으면서 달리기만 했다. 할 수 없이 나도 다시 일어나 따라 달렸더니 이번엔 놈들이 나에게 덤벼들었다.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여기 따끔, 저기 따끔, 등이며 머리며 정신없이 쏘아댔다. 너무 따가워서 머리를 긁어대면 노란 벌들이 뚝뚝 떨어졌다. 살이 하나밖에 없는 놈들은 일단 쏘고 그다음엔 깨물어댔다. 순식간에 40여 방은 족히 쏘였다. 작은형은 그렇게 줄달음쳐서 다래끼도 버려두고 집으로 가버렸다.

 

쏘일 만큼 쏘여 얼얼했으나 일이 일단락되었을 때 생각해보니 내가 뽕을 안 따면 누에가 굶을 터였다. 그걸 생각하니 그냥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형이 버려두고 도망친 낫과 다래끼를 다시 가지러 벌집 가까이 살금살금 다가갔다. 다행히 벌들한테 들키지 않고 낫과 다래끼를 수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걸 챙겨서 건너편 논에서 두렁을 깎고 계시던 아버지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다래끼를 건네 드렸다. 내 몰골을 보신 아버지는 끌끌 혀를 차셨다. 아버지는 논두렁 깎기를 중단하고 뽕을 따라 산으로 가셨고 나는 집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논에서 200여 미터 집 쪽으로 자그마한 고개가 있었는데 그쯤 갔을 때, 작은형을 일단 조치를 해주신 엄마가 헐레벌떡 올라오시면서 괜찮은지 다급하게 물으셨다. 작은형이 벌한테 쏘여서 엉망이 되어 왔기에 ‘복현이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셨더니 모른다 했고, ‘갸도 쏘였느냐’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는 거였다. 그런데 작은형은 왔는데 나는 안 왔으니 필시 잘못되었다 싶어 급히 달려온 것이라 했다. 엄마를 따라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된장으로 내 몸 곳곳을 발라주셨다. 그러면 용하게도 만 하루만 지나면 멀쩡했다.

 

그날 엄마는 얼마나 섬뜩했으랴. 큰놈은 벌한테 쏘여 죽겠다며 왔는데 작은놈도 쏘였다는데 오지 않으니 잘못되었다 싶었을 것이다. 얼굴을 집중 공격당한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리 것이 잘 걸어오는 걸 보신 어머니는 무척이나 안심하고 반가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버지는 워낙 무던하셔서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으나 엄마는 나한테 가끔 ‘미련 곰탱이’라고 부르곤 하셨는데, 나 역시 엄마를 닮아 웬만큼 아픈 건 거의 내색을 하지 않는 편이다. 지금 생각해도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지만, 그걸 잘 참아낸 건,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고, 그 일을 처리한 건 지금 생각해도 대견하긴 하다. 엄마는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느냐며 책망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견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싶다. 장난하다 그런 것도 아니었고, 뽕을 따러 가다 돈 좀 벌겠다고 한 일이었으니. 미련한 성격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 세상 요령껏 나는 살지 못하는 게 흠이다. 그건 평생 못 고치는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헐레벌떡 올라오시다 나를 본 순간 엄마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오늘은 어버이날인데, 엄마도 아버지도 뵐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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