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5- 왜 뱀은 너무 징그러운지!

영광도서 0 439

징그럽다, 무섭다, 싫다, 인간의 원초적 기억일까, 배우지 않아도 뱀은 그야말로 징그럽고 무섭다. 아무리 미운 놈이라도 보면 볼수록 정든다지만, 이놈들은 볼수록 징그럽고 싫다. 누군가에겐 먹거리라 반가울 테지만, 누군가에겐 돈벌이 대상이라 좋을 테지만, 대부분에겐 뱀은 부정적인 존재들이다. 특히 나에겐 뱀은 아주 징그럽고 두렵고 증오스러운 존재이다.

 

그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나때’는 농촌에선 걸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일을 해야 했다. 학생이란 특혜는 전혀 없었다. 학교는 형식적으로 다닐 뿐이었다. 학교에 다녀와도 그냥 놀 수 없었다. 토끼풀을 뜯어오거나 소꼴을 베어오거나 동생들 업어주거나 감자를 까거나 무엇이건 해야 했다.

 

여전히 광암리에 처음 이사 온 집에 살던 때였다. 네 살 때 내 생일에 이사 온 집, 허름한 초가집이긴 했지만, 온돌방에 동남향으로 윗방과 아랫방 그리고 부엌을 잇도록 본채가 지어졌고, 부엌에서 앞으로 덧붙인 외양간이 연결되어 기역자 모양의 집이었다. 외양간은 소귕이 있는 앞쪽은 봉당과 접하면서 뒤쪽은 마당과 면하고 있었으니, 본채의 모습은 기역자 모양이었다. 아랫방 맞은편, 그러니까 마당 건너엔 사랑채가 있었다. 얼핏 보면 외양간과 사랑채가 붙은 것처럼 보여 전체적으로는 디귿자 모양이지만 외양간과 사랑채는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집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사랑채엔 가끔 떠돌이거나 잠깐 마을에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들어 살곤 했다. 김현네 모자도 거쳐 갔고, 봉양 캐는 아저씨도 얼마간 머물다 갔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누나 한 분과 아줌마 한 분이 한동안 살다 가기도 했다. 어떤 대가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들어와 살던 이들과는 아주 사이좋게 부모님은 사이좋게 지낸 것만은 확실하다. 멀리 이사를 가고도 어쩌다 일부러 그립다며 과자랑 사서 가져다주시곤 한 걸 보면, 우리 부모님은 착하셨던 건 분명하다.

 

아주 극심하게 어려운 시절이 지났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채에 잠시라도 들어 사는 이들이 없었다. 그때부터 사랑방은 더 이상 방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창고로 사용했다. 봄이 올 즈음이면 이미 먹거리는 없었다. 그나마 흔한 게 감자라서 감자를 보관하는 창고였다. 사랑채에 감자를 두면 썩지 않았다. 때문에 사랑방엔 초여름까지도 감자가 꽤 있었다. 그렇게 보관중인 감자를 까는 게 학교에 다녀오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저녁거리만큼 대야에 담아서 밖으로 내다가 우물가에거 깐 다음 물에 담가 놓으면 되었다. 겉은 거무칙칙하지만 숟가락으로 살살 긁으면 껍질이 점차 제거되고 흰 살이 나왔다. 그 다음엔 대야에 물을 부어 놓으면 그걸로 임무는 끝이었다.

 

초여름이었다. 3학년 때였다. 학교에 갔다 와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나보다 네 살 아래인 동생을 데리고 놀면서, 막냇동생을 업어주거나 보살피면서 저녁 식사용으로 감자를 까서 물에 담가 놓는 일이었다. 하여 막냇동생을 업은 채 창고로 쓰는 사랑채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랑채 대들보에 뱀이 기어가고 있었다. 기겁하여 대야를 팽개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뱀이 뒤에 따라오는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바로 아래동생을 재촉하여 앞세우고 위로 달렸다. 엄마랑 아버지랑 김을 매는 밭, 그날은 하필 집에서 1킬로미터는 될 금천 네가 부치다 간 밭에 간 날이었다. 계속해서 오르막인데 뒤에서는 뱀이 따라오는 것 같은데, 동생은 앞에서 아장거리며 재촉해도 빨리 가지 못했다. 등에는 동생을 업었지 앞에선 아장거리지 마음이 무척 급했다. 그렇게 뒤도 못 돌아보고 엄마랑 아버지랑 김을 매는 다락터 밭까지 가서 엄마를 만나고야 안심했다.

 

그랬다. 나는 안심했지만 엄마는 참 한심해 하셨을 것 같다. 그때도 싫었지만 지금도 뱀은 싫다. 산을 무척 좋아한다만 여름이면 오지 산 같은 곳에 못 가는 게 혹시나 뱀이란 놈과 마주칠까봐서다. 때로는 솔직히 나는 제법 영리하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런데 이런 걸 보면 나처럼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사람은 공평한 거다. 사람이 잘나면 얼마나 잘나고 못나면 얼마나 못나랴. 그저 생긴 대로 마음 편히 사는 것이지. 보이지는 않는다만 요즘은 뱀보다 코로나19, 말은 좋아 왕관이란 뜻이라지만 뱀보다 코로나19가 징글징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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