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6- 순수시대, 교회도 사람도 순수했던 그 시절

영광도서 0 593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면서 가끔 교회란 말이 회자된다.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서 안타깝다. 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도 교회하면 믿는 이들끼리는 사로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형제요 자매였으나, 믿지 않는 이들이 바라볼 때는 이기적인 면이 많다는 둥, 배타적인 면이 많다는 둥, 끼리끼리만 형제자매라는 둥, 교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다가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중심 뉴스에 하필 교회란 집단이 등장하면서 더 더욱 부정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라때, 나 어렷을 적엔 교회에 대한 인상은,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긍정적이었다. 다만 부정적이라면 바쁜 데 일요일에 교회에 가느냐는 것만 제외하고는 교회는 동네에 이롭게 하는 기관이었고, 특히 가난한 이들에겐 큰 위안이 되는 곳이었다.

 

우리 동네엔 천주교가 먼저 있었다고 했다. 학교 가는 길에 지나야 하는 외솔배기엔 건물은 사라졌지만 천주교가 있었던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천주교에선 동네 사람들에게 구호물자를 전달해주었다. 관에서 나오는, 예를 들면 외상 비료든 외상 농약이든 이자가 저렴한 영농자금이든, 그 무엇은 대부분 소위 동네 유지들 차지였으나 적어도 천주교에서는 우선적으로 옷이나 노란 옥수수 가루 같은 구호물자들을 정말 어려운 이들부터 챙겨 나누어주는 좋은 일을 많이 하였다. 나 역시 덕분에 크긴 하지만 검정색 중학교 교복을 얻어 입고 괘 여러 해를 단벌 삼아 초등학교 다닐 때 입곤 했다. 코가 나올 때마다 팔소매로 닦곤 해서 그 부분이 반들반들하긴 했지만, 천주교는 좋은 곳으로 동네 어른들이 생각하고 집회에 거의 모든 어른들이 참석하곤 했으나 어느 순간 없어졌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동네엔 감리교회가 있었다. 비록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 푼푼이 낸 헌금으로 운영해서 재정은 아주 약해서 목사님을 모시기는커녕 전도사조차 모시지는 못했다. 대신 그 역할은 잠깐 예비목사님들이 와서 거의 생활비를 받지 못하고, 간신히 끼니만 이을 정도로 봉사를 하거나 그런 공백 기간엔 교회에 딸린 농토를 경작하는 권리를 맡은 권사님이 교회를 운영하곤 했다.

 

동네 모든 이들이 다니지는 않았다. 그래도 집집마다 한둘 이상은 교인이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 날엔 동네어른들 모두 교회에 모였다. 그 날은 교회에선 별식을 마련하여 동네 모두 축제처럼 하루를 즐겼다. 저녁이면 아이들이 준비한 재롱잔치를 즐겼다. 그만큼 교회는 다니기엔 술도 끊어야 한다지, 담배도 피워선 안 된다지, 그래서 그런 걸 부담스러워하는 어른들은 있었어도 교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덕분에 동네 아이들은 거의 모두 교회에 다녔다. 다만 일손이 바쁠 때면 교회에 빠지는 날이 많았으나 겨울이면 거의 모두 교회에 모였다.

 

사실 학교 소풍 때면 도시락을 쌀 수 없었던 형편이었던지라, 소풍에 따라간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교회에서 가는 소풍엔 여러 번 따라갔다. 주로 봄이면 한 차례 교회에선 소풍을 갔다. 가는 장소야 해마다 비슷하게 귕소 근처나 조금 더 멀리 가면 용소계곡에 가곤 했다. 가난한 어른들이라 해도 교회에 다니는 어른들은 정성스럽게 음식을 충분히 준비해 왔다. 점심때면 어른들은 각기 가져온 음식들을 모두 한 곳에 내놓고 모든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기 때문에 빈부의 귀천이 없었다. 덕분에 가난한 집 아이들에겐 잔칫날 같았다.

 

게다가 점심을 먹는 시간에 주일학교 교사들이 보물을 감추었다가, 오후에 보물찾기 시간이 있었고 우리는 그걸 찾는 재미가 있었다. 한 아이가 여러 장을 찾는 경우가 있다면, 어차피 선물은 하나밖에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못 찾은 아이에게 나누어주었다. 하여 모든 아이들이 노트든 연필이든 선물을 받아 돌아왔다. 선물을 그냥 주지는 않았고 재롱을 부리게 하여 웃고 즐기는 하루가 교회 소풍이었다. 그 재미 때문에 아이들이 교회에 다닌 예가 많았다.

 

순수했던 교회, 순수했던 교인들, 큰 것이 오가지 않아서 작은 것을 서로 나누었던 덕분이었을지 몰라도 그때 천주교회나 교회는 고마운 집단이었다. 하긴 그때 마을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서로가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는 이웃사촌이긴 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다면 모두 모여 해결해주려 했고, 슬픔이 있다면 기꺼이 모두 위로하려 했고 함께 슬퍼했다. 순수한 교회의 시대였다. 순수한 사람들의 시대였다. 순수시대였다. 비록 가난한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사람다운 사람들이 살았던 순수시대였다. 그때 그 어른들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머언 먼 세상으로 떠났고, 그때 순수했던 아이들은 이제 노년의 길로 접어드는 차이니, 이젠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대, 그리워할 수도 없는 시대, 끝날 듯이 끝날 듯이 끝나지 않는 긴 터널 속에 머무는 듯한 코로나의 터널 속에 있으려니, 잠시 꿈에라도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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