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7- 언덕 위 예배당의 주일학교 순수시절

영광도서 0 571

“언덕 위에 하얀 예배당” 가수 조영남이 부르는 이 노래, 그 노래를 들을 때면 나 어릴 적 교회당이 떠오른다. 하얀 예배당은 아니지만 언덕 높이에 자리하고 아이들을 부르고, 어른들을 모으던, 어쩌면 마을에서 유일하게 특별한 문화를 제공하던 예배당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낙엽송 사이에 매달린 산소통, 둑이 높은 교회 앞마당, 죽대끼를 모아 만든 교회 화장실, 높이 솟은 십자가, 그럼에도 나의 정신에 많은 영향을 미친 예배당이었을 터이니, 가끔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를 때면 제 일번으로 떠오르는 곳이 언덕 위 예배당이다.

 

가족고개에서 신작로를 따라 내려가노라면 우측 산쪽으로 춘일이네 집이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면 부잣집 허씨네, 그 다음엔 4-H 비석이 있는 작은 언덕, 이어서 막거리, 조금 지나면서 겸사가 다소 급한 즈음에서 우측으로 백여 미터 조금은 가파른 언덕 위, 산 밑에 교회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요일이면 이른 아침부터 ‘처언 당 처언 당’ 종소리가 울렸다. 높이 솟은 낙엽송 두 그루에 든든한 막대기를 걸치고, 거기에 매달은 산소통을 울려 나는 소리였다. 산소통이 교회의 종소리를 대신했다. 매달린 산소통을 제일 먼저 교회에 간 주일학교 선생이 치곤했는데, 문드러진 도끼나 소위 쌍메라고 부르는 큰 망치가 종을 치는 도구였다. 물론 자루는 물푸레나무여서 무척 단단했기 때문에 가끔 종을 치다 도끼나 망치가 빠지는 경우는 있었으나 자루가 불러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울린 교회의 산소통 종소리는 아주 멀리서도 듣기 좋게 마치 천당 천당하며 아이들을 부르듯 고요한 농촌의 적막을 희망으로 깨우곤 했다. 이 종소리면 우리 동네 어디서든 다 들렸다.

 

언덕 위 교회, 광암감리교회, 예배당 안에 들면, 검붉은 마룻바닥, 앞에는 맨 앞쪽 제단 앞에 어른용 강단 탁자가 성스럽게 자리하고, 그 앞쪽에 일정 공간을 두고 작은 탁자, 그 탁자에서 수요예배나 아동예배를 드렸다. 예배당 문은 둘로 여자용문과 남자용 문이 따로 있는 셈이었다. 좌측 문으로 남자들이 들어갔고, 우측 문으로 여자들이 들어갔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강단용 탁자를 중심으로 중간에 일 미터쯤 간격을 두고 그대로 남녀가 나누어 앉았다. 이는 아동예배에 참석하는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종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교회당에 모여들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멀리서는 4킬로미터 밖에서도 오는 아이가 있어서 3-40여 명의 아이들이 모이곤 했다. 주일학교 선생들은 많이 배운 이들은 아니었다. 소위 주일학교를 다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모두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들 중에 조금 똑똑하달까, 말을 잘하는 이가 주일학교를 이끄는 교사로 한두 명이 예배를 교대로 인도했다. 나 4학년 때는 남자교사 JS, 여자교사 SJ 둘이 교대로 한 주씩 예배를 인도했다. 그 이전에 교사를 하던 이들은 덕소나 서울 어디메로 공장에 취직하여 떠난 후였다. 세상 공부를 많이 한 적도 없고, 특별히 교사가 되기 위해 배운 적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맡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일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교사로 인정받았다.

 

예배시간은 지금과 거의 같았다. 준비찬송을 하다가, 사도신경 암송,. 이어서 아동용 찬송을 한 곡 부르고, 교사가 하는 대표기도, 교사의 설교,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서 요절 외우기, 분반공부로 한나절 가까운 주일학교는 끝났다. 그때는 미리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았다. 진행 중에 대표기도는 그날 참석한 교사들 중 즉석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교사가 지명하여 시켰다. 때문에 대표기도를 시키면 무척 애를 먹는 이도 있었다.

 

내가 4학년 때였다. 그날은 마침 나보다 3년 선배 R이 갓 교사가 되었는데, 예배를 인도하는 교사가 그에게 대표기도를 시켰다. 우리 모두 눈을 감고 기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어 기도를 시작했다. 첫 대목은 거의 모두 같듯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여기까지는 무난히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결국 나온 말은 “야, 나는 못하겠다. JS 너 해라!” 라며 예배를 인도하는 교사의 이름을 부르는 거였다. 그 말에 아이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까르르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아이들 모두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이라 교사들 말에 아주 잘 순종하는 편이었지만, 그 말은 견디지 못했다. 소동은 한참이 지나서야 수습이 되었고, 예배는 가까스로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교사가 되어 3-4년 있다가 어느 순간 마을을 떠나 도회지로 나가는 반복이 지속되었다. 물론 오래 시골에 남은 이는 읍에서 열리는 교사강습회가 있어 참가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교사들 말을 잘 따랐고, 진심으로 교사로 인정했으며, 우러러 보았다. 그럼에도 웃음 앞에 아이들이 어찌 견딜 수 있으랴.

 

지금도 그때 그 예배 시간을 생각하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어쩔 수 없이 소동이 일고 아이들은 감았던 눈을 뜨고 일제히 시선이 기도를 맡은 이를 향했을 때, 붉을 대로 붉어진 얼굴로 어찌할 줄 모르던 교사의 모습이며, 이를 수습하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던 인도교사, 떼굴떼굴 구르며 웃음을 참지 못하던 아이들, 순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다. 다시 재연된다면 웃다가 울다가 해야 할 교행을 더 더욱 그립게 하는 장면이다. 지금도 그러려나? 여전히 산소통이 ‘천당 처언당’ 소리를 내며 산야로 마을로 울려 퍼지려나, 감옥살이하듯 하는 요즘은 더 더욱 고향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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