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0- 요즘은 엄마가 더 그립다

영광도서 0 470

“어머니, 제가 아파서도 아니고 서러워서도 아닙니다. 어머니의 매질이 전보다 힘이 없어서, 그것이 마음이 아파서 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매를 맞은 일화로 유명했던 김구 선생이 실제 어머니에게 매를 맞으면서 한 말이다.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석으로 있을 때, 선생의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서 선생 앞에 내놓으시면서 “얘야, 시장에 나갔다가 버리는 시래기들이 있기에 주워와 끓였다.”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잠시 말이 없던 김구 선생은 “어머니, 이젠 이 나라 주석의 어머니신데 체면이 있지요.”라고 답하자 선생의 어머니는 “ 이놈이, 종아리 걷어! 네가 이 나라 지도자라면서 우리보다 굶주린 백성을 생각 못하면 되겠느냐?”라시면서 불 같이 화를 내시면서 회초리로 선생의 종아리를 때리셨다. 어머니를 내려다보던 선생은 서럽게 물었다. 어릴 적부터 매를 때려왔으나 늘 기꺼이 매를 맞곤 했던 선생이 서럽게 울자 놀란 선생의 어머니는 그 이유를 물었다 한다. 그때 선생의 대답이 “어머니, 제가 아파서도 아니고 서러워서도 아닙니다. 어머니의 매질이 전보다 힘이 없어서, 그것이 마음이 아파서 웁니다.”였다. 이후로 선생의 어머니는 그에게 매를 든 적이 없었다고 전한다.

 

많은 이들이 이 일화를 교육적으로 예를 들어 말한다만, 나는 이 일화를 들을 때면 단순하게 엄마 생각이 나곤 한다. 나의 엄마도 무척 매를 많이 들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워낙 마음이 여려서 어떤 자식에게도 험한 말씀을 한 적이 없으셨다. 더 더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에게 매를 든 적은 없으셨다. 그러나 한 가정을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가정을 꾸려가려면 누군가 한 분은 악역을 맡아야 했다. 그 악역을 엄마가 맡으셨다. 엄마께서 교육적으로 배우신 것도 아닌지라 일단 일이 벌어지면 우선 매를 때리는 게 방식이었다. 때문에 엄마는 무척 무서웠다.

 

나의 첫 시라고 할 시에서는 “선생님은 선생님은 우리 아빠 같아요. 화내실 땐 무서운 호랑이 같죠. 선생님은 선생님은 우리 엄마 같아요. 웃으실 땐 하늘나라 천사 같지요.”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다만 시를 쓸 때는 그렇게 써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한 번은 작은형하고 나하고 안방에 갇힌 채로 엄청 매를 맞았다. 엄마가 보관하던 돈 이백 원이 없어졌다는 거였다. 어른 하루 품삯이 오백 원 할 때였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 돈을 훔친 범인으로 지목될 만한 사람은 나와 작은형밖에 없었다. 내가 아홉 살, 작은형이 열두 살, 동생은 고작해야 일곱 살이었으니, 돈이 없어졌다면 누명은 우리 둘이 쓸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매는 모질었다. 매가 무척 아팠지만 피할 길이 없었다. 훔치지 않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엄마는 들은 척도 않고 매를 때리셨다. 할 수만 있다면 비록 훔치지 않았더라도 돈을 만들어 내놓고 싶었지만 그럴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때야 말로 아이들의 수중에 일 원도 갖기 어려웠으니, 다른 말로 아이들은 땡전 한 푼 가진 것이 없었다. 주머니를 뒤져도 돈이 나올 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따로 개인 소지품을 두는 곳도 없었다. 땅을 파고 묻었거나 훔쳐서 무엇을 사먹었거나 그것을 빼놓고는 어디에도 근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한참을 때리셨다. 그리고 나서야 안방에서 해방되었다. 눈물범벅이 되어 땟국물이 얼굴에 얼룩지고 나서야. 그렇다고 항의를 할 수도 없었다.

 

얼마 후에 낮일을 끝내고 엄마는 밤에 아버지와 맷돌질을 하기 위하여 안방 벽에 걸린 체를 꺼내셨다. 그런데 그 쳇바퀴 안에 돈 이백 원이 고스란히 있었다. 그제야 머쓱하신 엄마께서 “그 돈이 여기 있었군!”라고 말씀하셨다. 그 외에 덧붙여 미한하단 말씀이나 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교육적으로야 지금으로 치면 일단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적절한 벌을 줄 것임을 아이와 협의를 하고, 벌을 가해야 바른 일이지만, 혹여 잘못된 벌을 했다면, 솔직하게 시인하고 미안함을 표현해야 바른 교육이다 만, 그때의 부모들은 대부분 우리 엄마 같았다.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다고 엄마가 원망해서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때는 모두 그러려니 했으니까. 김구 선생이 엄마의 매가 예전처럼 세지 않은 것이 서러워 울었듯이, 어른으로 내 삶을 책임지고 산다는 것은 참 외로운 일이다. 서러운 일이 있어도, 고통스러운 일일 있어도 어릴 적 같으면 “엄마!”하고 부르면서 엄마에게 기대도 엄마 품에 안겨 울 수도 있으련만, 설령 어른이 되었고 함께 늙어간다고 해도 엄마라면 품에 안겨 울 수도 있으련만, 엄마 지금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시다. 비록 힘은 나보다 약하고, 아는 것은 나보다 적어도 영원한 마음의 안식인 엄마, 요즘은 엄마가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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