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1- 엄마는 언제나 엄마다!

영광도서 0 456

엄마는 언제나 엄마다. 그런 것 같다. 어렸을 때는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엄마가 해결해주거나 보호해주시니 엄마가 필요했다면, 나이 들어서도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힘들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도 엄마였고, 더 나이 들어 더는 세상에 안 계셔도 힘든 일을 당하거나 외로울 때면 엄마가 무척 그립다. 때로는 나도 몰래 ‘엄마’라고 공허하게 혼잣말로 외치면서 시큼하니 눈물이 난다.

 

이렇게 엄마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수호신처럼 남는 이유는 어려서의 기억도 적잖이 염향을 미치는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무관심했으나, 아니면 마음과 달리 소극적으로 우리를 지켜봤다면, 엄마는 훨씬 적극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우리를 보호하려 나섰던 모습들을 기억하는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내 이마가 엄청 깨졌던 날이 있었다. 처음 광암리 가족동에 이사 올 때, 아버지가 지고 오시던 쇠여물용 가마솥 지게를 대신 져다 주시던 아저씨, 허씨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앞집이 허씨네였다. 그 집엔 나보다 6년 쯤 위인 관수형, 그 위에 관수 누나 선녀, 그리고 허씨 아저씨 부부 넷이 살았다. 한때 선녀 누나와 큰형이 사귀기까지 했었다. 우리가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허씨네가 이사를 가고 난 후 문제의 박씨네가 그 집에 이사를 왔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뺨에 제법 큰 검은 점이 있어서 점박이란 별명을 가진 종수형네였다. 나보다 3년 선배였다. 그 집은 옆마당이 넓어서 동네에 뻥튀기 장수가 오거나 이동 정미소가 오면 그 집 마당에까지 경운기가 들어와 한동안 동네 일거리를 하던 집이었다. 그만큼 마당이 넓은 덕분에 아이들이 그 집 마당에 모여 놀기를 즐겼다.

 

초겨울이었다. 그 집 옆마당에서 리을 놀이(가이상)을 하였다. 이 놀이는 리을 모양으로 겹 그림을 그려놓고 편을 나누어 공격과 수비를 하는 게임으로, 어렸을 때 아이들이 많이 하는 놀이였다. 그 놀이를 하다 그만 종수형이 나를 잡아 제압하다는 것이 잘못해서 나는 언 땅에 이미를 박고 넘어졌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이마가 엄청 부었다. 커진 이마 때문에 눈이 잘 안 보일 정도에다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놀란 아이들이 나를 부축해서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내 모습을 보고 그렇게 된 이유를 작은형한테 물었다. 작은형과 종수형은 동갑이었으니 같이 놀다 그런 거였으니 상황을 잘 알았다. 종수형을 포함해 함께 논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만, 놀다가 그리 됐다고 작은형이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그 길로 종수형네 집으로 달려가셨다. 엄마는 잠든 종수를 깨워서 어떻게 애를 그 모양으로 만들었느냐고 혼을 내고 오셨다고 했다.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엄마가 그렇다고 상스러운 말로 욕을 하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속이야 상하셨겠지만 엄마는 우리한테도 매는 들지언정 욕을 한 적은 없으셨으니까. 그럼에도 다음에 종수형을 만나니까 미안했다. 그 후로는 그 형과 다시 놀이를 한 적이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 이마에 혹 덕분에 나는 사흘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부기가 다 안 풀리고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았을 때에 그럼에도 학교에 가니까 선생님이 사무실로 데려가 빨간 옥도정끼를 발라주시면서 뭘 그렇게 세게 들이받았느냐고 한 마디 하셨다.

 

엄마들은 그런단다. 내 아이가 남한테 맞고 들어오느니보다는 남을 때리고 들어오는 편이 차라리 낫단다. 그만큼 아이에 대한 보호본능을 가진 게 엄마들이다. 내 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겉으로는 애정표현을 안하셨어도 고뿔을 앓거나 배앓이를 할 때면 안타깝게 이런 약 저런 약 만들어 먹이시던 엄마의 손길, 그 기억이 차곡차곡 쌓인 덕분에 나이 들어서도, 늙어서도 엄마는 늘 나의 위안이요, 늘 보호자로 마음에 남은 듯하다.

 

꼬박 일주일 만에 다시 대하는 글쓰기, 이 순간도 엄마가 마냥 그립다.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생각나지.” 엄마는 언제나 엄마다. 항상 나보다 저 만큼 어른으로 앞서 있는 분, 닿을 듯이 닿지 않는 나보다 어른으로 저만치서 웃음 짓는 분, 엄마는 언제나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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