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68- 눈처럼 내리던 삐라의 날들
삐라, 모처럼 듣는 말들이 연일 뉴스를 장식한다. 우리나라에서 북으로 삐라를 날려 보낸다고 야단이고, 북한에서 삐라를 날려 보내겠다고 협박한다. 삐라란 말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라기보다 아주 오랜 이야기임에도 새삼스럽다.
아마 2-3년 전이었지, 서울의 야산, 이를테면 우리 집 옆 산인 초안산이나, 북한산, 도봉산에서도 북에서 날려 보낸 듯한 삐라가 제법 있었는데, 아주 조잡하여 관심을 가질만한, 보관하고 싶을 만한 것은 못되었다. 나 어렸을 적에 보았던 것과 비교하여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때는 검정색이거나 검푸른 색 글씨와 캐리커처 형식의 그림으로 채워진 것이었다면, 근래에 발견한 삐라들은 조잡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얼핏 칼라로 되어 있다는 것만 달랐다. 내용은 이전의 것보다 재미는 오히려 덜하면 덜했다.
내가 살던 강원도 홍천은 북에서 가까운지 비라가 엄청나게 많이 내려왔다. 어떤 날은 마치 눈이 내리듯 하늘에서 온통 삐라들이 하늘을 빼곡하게 치우듯이 날아 내려왔다. 그런 광경은 마치 눈이 내리는 것만큼이나 멋졌고, 신나기로는 눈이 내리는 것보다 더 신났다. 손이 재빠른 아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삐라를 집적 받는 재미를 맛보았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삐라를 많이 수집하는 재미를 즐겼다.
삐라의 크기는 꽤 여러 종이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삐라에서부터 그것보다 배 정도 크기의 것 또는 A4 용지 크기의 삐라도 가끔 주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책자 삐라도 더러 주울 수 있었다. 그것 역시 손바닥만 한 책자로 기드온협회에서 나누어주던 신약성서만 한 두께의 책자도 있었고, 그것의 배 두께는 되면서 크기는 32절지 크기의 책자도 더러 주울 수 있었다.
내용은 제법 다양했다. 미제 양키 제국주의니, 박정희 괴뢰도당이니, 주로 남한 정권과 미국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우리나라 대통령과 모 여배우 사건을 진실이라면서 구성한 내용도 있었다. 그 외에도 ‘아무개 대위가 김일성 수령의 따뜻한 품에 안겼다’면서 행복한 모습의 그림을 담은 삐라와 같은 북으로 귀순한 군인들을 다룬 삐라도 있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으로 보면 수년 전에 주울 수 있었던 내용은 내용도 별로 없었고 전혀 흥미를 주지 못할 조잡하고 관심조차 없는 내용이었던 데 비해, 그때 삐라는 다양한 인쇄물을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런지 몰라도 제법 읽을 만한, 읽고 싶은 유혹을 주는 내용, 비록 어렸지만 읽는 재미를 주는 내용이었다. 물론 삐라를 읽으면 혼난다는 교육을 받긴 했으나 책 삐라를 주우면 흥미로워서 읽어보곤 했는데, 아무개 동무니 뭐니 하면서 연애소설인 듯한 내용이어서 나름 읽을 만했다.
삐라를 주우면 학교에나 지서에 내라는 교육을 받았지만 책을 주우면 책이 귀한 때라 책 삐라는 내지 않고 보관하고 싶었다. 그러다 혹시 다른 친구가 보고 신고할까 싶어 그런 두려움에 결국 숨겨두었다가 학교에 내긴 했지만, 내용을 잘 이해는 못해도 가끔 읽기도 했다.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숙 동무니’ ‘혁명이니’ 하는 내용은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는 삐라를 주우면 학교에 내거나 지서에 내도록 교육을 받았다. 학교에 삐라를 내면 선생님은 이름을 적고 장수를 적었다. 그렇게 하여 나중에 어느 정도 기한을 정해 가장 많은 삐라를 낸 학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몇 등까지는 상을 주었다. 상이라면 그다지 비싸지 않은 3원, 5원, 10원짜리 노트였다. 노트 뒷면엔 검푸른 색으로 도장을 찍어주었다. 가운데엔 원이 그려 있고, 원의 위쪽엔 반공방첩이란 글자가 찍혔고, 아래쪽은 원을 따라 간첩신고는 113이란 글자가 찍힌 노트를 상으로 주었다. 워낙 삐라를 많이 내는 아이들이 많이 학교에서 상을 받기는 어려웠지만 주운 빠라는 학교에 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서에, 그때는 경찰서라 불렀다. 지서에 열 장 이상 삐라를 내면 3원 짜리 노트를 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부터 학교에 낼 것은 내고 어느 정도는 남겨두었다가 지서에 내고 노트를 받아오곤 했다. 그렇다고 자주는 할 수 없었다. 지서가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8킬로미터는 되는 면소재지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3일이나 8일에 열리는 5일 장날 아버지를 따라가면 그때 얼른 들려서 삐라를 내고 노트 한 권을 받아오곤 했다. 어떤 때는 노트가 떨어졌다며 못 받아오는 때도 있어 그것도 운이었다.
그것보다 더 신나는 것은 어쩌다 삐라를 싣고 온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풍선을 줍는 일이었다. 그것을 날려 오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낚시 찌 모양이랄까, 볼링 공 모양을 닮았는데 날씬한 모양의 도구를 주우면 그것 또한 신기했다. 특히 고무풍선은 좀 두꺼웠지만 그것을 조각조각 잘라서 풍성으로 불면 엄청나게 즐길 수 있었다. 풍선 하나, 우리는 그때 낙하산인 줄 알았고 낙하산이라 불렀는데, 그것 하나 발견하면 온 동네 아이들 모두 모여 불고 놀아도 실컷 놀 만큼 아주 요긴했다. 때로 어른들이 거기 독이 묻었다고 경고하기도 했지만, 그런 풍선 하나 주우면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자랑거리였고.
그랬다. 그냥 놀이의 대상이었던 삐라, 지금도 기억나느니 어느 날 하늘을 수놓으며 눈처럼 내리던 날의 풍경을 추억처럼 떠올리게 하는 것에 불과한 삐라, 요즘 그 말들이 세상을 수놓는 것을 들으며, 그 광경을 떠올린다. 세월이 흘러도 삐라는 변하지 않는구나 싶기도 하고. 그 단어 하나로 옛날과도 같은 어린 날의 추억 하나 떠올린다만 한동안 삐라, 아니 대북전단이니 대남전단이니 하는 말로 세상이 시끄러울 듯하다. 별로 감흥은 없는 누구나 다 아는 옛날이야기 같은데 현실적인 문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