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78- 사태가 일어나던 날

영광도서 0 507

장맛비가 쏠쏠하게 내리는 아침이다. 남쪽과는 달리 심하게 내릴 것 같지 않다. 때문에 그다지 걱정스럽다기보다 코로나가 아니라면 빗물 흐르는 분위기 괜찮은 어는 카페를 찾고 싶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 뭔가 뭉클한 감동을 받거나 누군가의 슬픈 체험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주체하지 못하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그런 카페에 앉아 모처럼 세상 시름 잊고 구수한 커피 향을 음미하고 싶다. 잠맛비가 내리지만 그런 아침이다.

 

시골에 살 때엔 이런 마음일랑 꿈도 꾸지 못했다. 걱정이 앞섰다. 족히 2미터는 넘는 다랑논 논두렁이 터지지나 않을까, 고랭지 배추를 팔기도 전에 썩지나 않을까, 이런 저런 걱정을 줄줄이 하게 만드는 게 장맛비였다.

 

이런 마음으로 장맛비를 대하는 건 그래도 나았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무렵이었으니까. 오히려 그 이전엔 장맛비하면 꼭 따라오는 게 사태였다. 장맛비가 내리는 때면 그만큼 여기 저기 산사태가 일어났다. 산에 나무가 제대로 우거지지 않아서 민둥산인 곳이 많았고, 산이었을 경사진 곳들 곳곳은 화전이거나 풀밭이어서 비만 많이 내리면 늘 사태가 일어날 염려가 있었다. 우리 살던 집도 그랬다. 두촌면 자은리 흑둔지라는 곳에서 이사 온 집, 내 네 살 생일에 이사 온 내촌면 광암리 집, 우리 집 좌측으로 옆 마당이 끝나는 지점에 우물이 있었고, 우물을 둔 도랑을 경계로 야트막한 공원과 같은 야산이 있었다. 이 야산을 따라 위로 오르면 허리가 잘렸고, 위로 면유지가 묵밭 같은 민둥산이 이어졌다. 그걸 경계로 우리 집 뒷밭이 우리 집을 둘렀다. 그 다음 우측으로 이동하면서 작은 경사를 경계로 옆 마당쯤의 넓이의 작은 밭떼기가 우리 소유라면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 밭은 건너편 허씨네 밭이었다. 그 밭 아래로는 논 역시 허씨 소유였다. 집 앞으로 펼쳐진 밭만이 그런 대로 넓었으나, 평상시에도 습기가 많아서 농사를 짓기엔 부적합했다. 더구나 장마철이면 질척해서 어떤 곡식을 심든 그다지 소출을 내지 못했다. 당시 28000원에 샀다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장마철이면 사태가 덮칠까 위험스러운 집이었다. 뒤쪽으로 전부 면유지라서 민둥산 같은 묵밭이 자리를 잡았고, 그 위로는 급경사를 이루는 백우산 발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장마 때면 상황을 봐서 옆에 야산으로 나가서 밤을 새야 했다.

 

1966년, 막냇동생이 태어나던 해였다. 나, 나 역시 아주 어렸다. 그럼에도 아직도 생생히 펼쳐지는 사태가 일어나는 영상이 있다. 그해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우리 집 옆 야산, 단오 때면 그네를 매고 동네 아이들이 모여 그네를 타는 야산 공터, 그곳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우리 앞집 허씨네 역시 평평한 밭 한가운데 집이 있었으므로, 그 야산에 모여서 사태의 위험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 사태가 난다는 아버지의 외침에 따라 우리 집 뒤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주춤한 때였는데, 갑자기 크게 울리는 천둥소리, 그 소리에 놀랐는지 우리 집 위쪽에 백우산 발치에서 포탄이라도 터진 듯 먼지 같은 것이 하늘로 한 무더기 오르더니 황토색 흙더미 같은 큰 덩어리가 우리 집을 향해 굴러오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우리 집이 사태에 묻힐 위험 앞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엄마와 아버지, 허씨네 아줌마와 아저씨도 안타까운 모습으로 장면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있는 야산 발치로 장마의 무리가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다d. 우물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고, 옆 마당은 진흙더미로 덮였고, 그나마 자라던 곡식들도 읽더니 속으로 묻혔으나, 다행히 집은 그대로 서 있었다.

 

평생 한 번밖에 볼 수 없었던 사태의 장면, 그때 우리 동네엔 피해가 무척 많았다. 특히 학교 가는 길, 물론 나는 학교 다니기 전이었지만, 외솔백이 채 못 미친 곳, 외솔백이는 언덕인데, 그 언덕을 오르기 전 평평한 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안쪽 산 밑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이 완전히 매몰되고 말았다. 그 집은 열세 식구가 살았는데, 다른 집에 놀러갔다 미처 집에 돌아가지 못한 한 사람만 빼고는 열둘이 하룻밤 사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집에 가서 시체를 꺼내는 일을 하고 오셔서, 송장을 꺼내는 일이 끔찍했다고 말씀하셨다.

 

산마다 민둥산이었던 시절, 그럼에도 땔나무를 그런 산에서 해결해야 했던 시절의 아련한 비극, 장마철이면 늘 산사태를 걱정하면서 지내야 했던, 한해 농사를 망칠까 걱정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장맛비는 낭만이 아니라 원수였다.

 

가난한 날엔 도시생활 역시 장마철이면 편치 않았다. 반지하방 세를 살 던 때는 장마철이면 하수구가 막혀 물이 차 들어올까 싶어 비를 맞으면서 하수구를 지켜야 했고, 때로는 반지하방 문턱에서 다른 곳으로 쉴 새 없이 물을 퍼 버려야 했다.

 

그랬는데 지금은 아파트에 안전지대랍시고 살고 있다고,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다니, 나란 인간도 참 간사스럽다. 아무리 공감한다고 해도 직접 겪지 않으면 공감은 하더라도 그 깊은 속 설움을 헤아리지는 못한다. 또한 그 시절을 지나고 나면 시간의 물결이 훑고 지나가 그 시절을 실감하지 못한다. 기억은 기억일 뿐 현실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간사스럽다는 말로 나를 합리화한다. 장맛비로 고통을 겪을 이들에겐 불경스러운 생각을 잠지 했던 나,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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