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0- 건빵을 위해 달려라!

영광도서 0 512

초록의 향연이 펼쳐지는 숲, 숲 속을 걸으면 참 즐겁다. 절로 기분이 좋다. 하여 틈만 나면 숲길을 찾는다. 산을 찾는다. 전에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다녔다만 지금은 슬슬 여유롭게 걷는다. 걸음도 나이를 드나보다.

 

한때는 달리기를 즐겼다. 달리면 좋았다. 차가 달리면 차와 경주를 하는 게 재미있었다. 아니면 숲길을 달리면 바람이 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요리 조리 꾸불꾸불 산짐승처럼 달리면 머리카락이 휙휙 날려서 기분 좋았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 나름 육상을 배운 게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겠다. 육상,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 기억에 남은 학교를 잊지 않기 위해 운동장 이야기부터 펼쳐놓고 봐야겠다.

 

신작로에서 돌다리로 강을 건너면 바로 20여 미터 쯤에 싸리나무 울타리를 둘러친 집 한 채 있었고, 그 집 뒤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학교였으나, 여기로는 공식적인 길은 없었다. 돌다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폭이 2미터도 안 되고, 다리 양옆의 난간은 블록 한 개 눕힌 정도의 높이라서 조금은 겁나는 시멘트 다리를 건너고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우측언덕에 가계집이 있었다. 가계집 앞에서 작은 도랑 하나를 건너면 그곳부터 신작로처럼 넓게 길이 닦였고, 30여 미터를 완만하게 오르면 그곳에 학교가 자리 잡았다. 그러니까 신작로에서 보면 꽤 높은 언덕에 학교 운동장, 그 뒤에 학교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가깝게 가려면 징검다리로 강을 건너야 했으나 선생님들이 금지했다. 안전을 위해 시멘트 다리로 건너려면 200여 미터를 돌아야 했고, 그 길로 가면 완만하게 학교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문이라고 문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운동장 안쪽과 학교 건물이 있는 가파른 언덕의 접점이 정문이었다.

 

여기서부터 운동장도 시작이었다. 학교 건물을 기준으로 보면, 학교 건물은 산발치를 깎아 지은 터라 학교는 한참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야 운동장이었다. 운동장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물론 어렸을 적, 학교 다닐 때에는 무척 넓다고 생각했다. 신작로에서 바라보면 제법 높은 언덕에 운동장이 있었다. 대신 운동장 앞쪽 면은 학교 건물 앞 가파른 언덕이 벽처럼 두른 형국이었다. 하여 정면 운동장 맨 앞 끝은 급경사 언덕, 나머지 좌우측은 운동장 끝에서부터 학교 건물 쪽으로 언덕 높이가 점차 낮아지는 형국이었다. 높이 솟은 언덕 위에 그다지 넓지 않은 운동장, 달리기 경주를 위해 선을 그으면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야 100미터쯤 되었다.

 

좁긴 했지만 운동장을 빙 둘러 제법 큰 벚나무들이 둘러 있어 봄이면 버찌를 주워 먹는 재미가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가끔 룰과는 상관없는, 한 학년 전체가 참여하는 떼거리 축구를 하거나 떼거리 핸드볼을 하거나 피구놀이를 했다. 이렇게 공놀이를 할 때면 공이 가끔 언덕 아래로 굴러 50미터가 넘는 강가에까지 굴러가기도 했다. 굴러가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운동장 바로 아래에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옥수수 밭이나 콩밭으로 공이 굴러 떨어져 곡식을 망가뜨리는 바람에 가끔 주인아저씨가 공을 돌려주지 않기도 했다. 하긴 학교 공이니까 걱정은 없었지만. 공을 갖고 놀려면 선생님이 진행하는 수업시간이 아니면 소사 아저씨한테 잘 보여야 했다. 공놀이를 할 기회는 드물었다.

 

대신 남자 아이들은 진놀이를 자주 했다. 학교 건물 쪽에 한 팀이 자리 잡고 운동장 끝에 한 팀이 자리를 잡고 즐기는 놀이, 당연히 발이 빠른 아이가 유리했다. 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거의 모두가 맨발로 뛰어다니면서 놀이를 했는데, 내가 가는 편이 거의 매번 이겼다. 발이 빠른데다 약삭빠른 덕분이었다.

 

그 실력 때문에 육상을 가르치는 선생의 눈에 들었다. 시골학교 육상부라야 여자 아이 둘에 남자 둘이었다. 비교적 덩치가 좋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들어갈 생각도 없었는데, 육상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담임선생님도 아니었으므로 나를 몰랐을 텐데 진놀이하는 나를 눈여겨보았나 싶었다. 다짜고짜 육상을 배우던 1년 선배하고 나를 운동장 한 바퀴 뛰는 시합을 시켰다. 선배는 운동화를 신었고 나는 맨발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검정고무신만 신고 다녔으니 그것을 신고 달릴 수는 없었다. 달리기 결과 지지 않고 거의 동시에 결승선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원치 않았으나 나는 육상부에 들었다. 연습이라야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운동장에서 학교 건물로 오르는 돌계단을 다다닥 거리며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거나 달리는 자세를 교정 받거나 달리기 시합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시합에 나갈 때까지 육상부에서 연습을 한 이유는 선수가 되고 싶은 생각 때문이 아리라 건빵 때문이었다. 육상을 하는 아이들에겐 특별히 연습이 끝나고 나면 건빵을 한 되씩 매번 주었다. 그걸 받는 재미에 열심히 했다.

 

그럭저럭 홍천군내 대회 날이 다가왔다. 선생님은 시합에 나가려면 맨발로 뛰어서는 안 되고, 운동화를 사야 한다고 하셨다. 또한 반바지에다 운동셔츠를 사야 한다고 하셨다. 학교에서 구입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준비해야 했다.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집에서는 그럴 형편이 안 된다고 하셨다. 더는 고집 부리지 않았다. 다음날 선생님께 그 말씀을 드렸다. 나는 포기하고 나머지 아이들만 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혼자만 못 갔지만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읍내였지만 왠지 궁금하지도 굳이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시합에 나가고 싶은 설렘이나 그런 것도 없었다. 다만 나는 건빵 받는 재미 때문에 달리기를 했을 뿐이니까. 그걸로 나의 육상 인생은 끝났다.

 

그때는 좁은 마을에서 세상 돌아가는 걸 몰랐으나 나중에 세상을 알고 나니 우리처럼 훈련 받아서는 대회에 나가야 수모만 겪었을 듯싶다. 나를 포함해 나머지 육상부 아이들 모두 학교 내에서야 잘 뛰었지만 대회에 나가면 잘 달리리란 보장이 없으리란 걸 선생님도 아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적극적인 투자를 안했으리라. 정말 희망이 보였다면 나에게 운동복도 제공하고 운동화도 사주었지 않았으랴.

 

지금도 그 일은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맨발의 아베베는 되지 못했지만, 육상을 하는 동안 건빵을 매일 받아다 작은누나, 작은형, 동생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엄마와 아버지도 대견스러워했을 테니. 그렇게 받아온 무미건조한 건빵을 화롯불에 소당을 올리고 사카린을 살짝 입혀서 들들 볶아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던지, 다시는 그때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도 그 건빵을 먹고 싶다는 것은 솔직히 가식이다. 작년까지는 가끔 그 맛이 그리웠다만, 밀가루 음식을 삼가라니 마음도 변덕을 부리는지 작년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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