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2- 호밀밭에서 놀던 날!

영광도서 0 447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에 해진다고

지저귑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님의 <가는 길>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자잘한 이야기들, 소소한 사연들이 떠오른다. 마치 앞강물과 뒷강물이 연이어 흘러 하나의 물처럼 흐르듯, 초등학교 시절의 슬픈 듯 순수하고, 아린 듯 순진한 시절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오고, 하나의 에피소드가 또 다른 에피소드를 불러오듯이,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는다. 황토밭에 심은 고구마를 캐노라면 뿌리를 따라 하나 둘 고구마가 줄줄이 따라오듯이 지난 이야기들, 특히 초등학교 이전의 사연들은 이제는 하나도 슬프지 않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탓이든, 하여 총천연색의 사진이 흑백으로 물이 빠진 것처럼 그리움만 남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졸업을 많이 남기지 않은 날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학교 운동장 뒤편, 벚나무 아래에 줄지어 세우셨다. 분단별로 세우셨으니 넉 줄이었다. 최종적으로 중학교에 진학할 학생들을 점검하는 날이었다.

우리 반 47명, 중학교 진학할 아이들은 이 중에서 여자 아이 두 명을 포함해 여덟 명이었다.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학교의 소재지는 두천면 괘석리에 있었는데, 두촌면 괘석리에 사는 아이들은 두촌면 소재지에 위치한 두촌중학교, 내촌면 광암리에 사는 아이들은 내촌중학교에 진학하도록 되어 있었다. 두촌중학교에 진학할 아이들이 더 많았다. 어느 중학교에 가는 8킬로미터는 걸어서 통학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중학교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어,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중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 그룹에 끼었던 것은 큰형의 말 때문이었다. 공부를 잘하려니 기대할 수 없었던 우리 집에서 나는 독보적으로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돈도 백도 없었지만 1학년 들어가지 마자 우등상을 받아왔다. 엄마는 그게 자랑스러워 신문지로 덕지덕지 붙인 안방 벽에 붙여두었다. 나중에 누렇게 변했다. 학년이 올라가도 매 학년 우등상을 받아왔다. 그러니까 큰형이 아무리 어려워도 어떻게든 중학교에 보내자고 하였다. 나는 우리 형제자매 중 최초로 중학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설레기도 했다. 엄마는 비록 나를 중학교에 보낼 능력은 안 되지만 늦게나마 독학으로 서울에서 대학에 들어간 큰형의 능력을 믿었다. 때문에 엄마는 나를 중학교에 보낼 것을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하시곤 했다.

그런데 막상 중학교 진학을 최종결정해야 하는 때가 왔을 때 그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큰형이 자신의 학비를 감당하기는커녕 없는 살림에 야금야금 우리 집의 여유도 없는 돈을 가져가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빚을 내야 했다. 블랙홀처럼 우리 집의 모든 없는 경제력이 큰형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 마당에 최종결정을 앞두고 나의 중학교 진학포기를 큰형이 선언했다. 큰형은 나에게 중학교 진학하는 대신에 통신으로 강의록을 사서 공부하라고 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결정이 이미 나 있었음에도 선생님은 나도 당연히 중학교에 갈 것으로 계산해 두었다. 그날 최종적으로 우리 여덟에게 일일이 의사를 물으셨다. 그 다음주에 면소재지가 있는 도관리 사진관에 원서에 낼 사진을 찍을 참이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내 앞에 오셨다. 당연히 중학교에 갈 것으로 생각하지 선생님께서 사진 찍으러 가는 말씀을 하시면서 내게 통보하셨다. 그때서야 나는 “큰형이 중학교에 가지 말고 강의록 사서 공부하래요.”라고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서러운 눈물이 솟았다. 울지 않으려 했으나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무조건 중학교에 진학하는 거야. 알았지. 일단 아이들하고 사진부터 찍으러 가고.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 같은 놈이 중학교에 안 가면 대한민국에서 누가 중학교에 가겠니.”라고 말씀하셨다.

더는 말을 못하고 울기만 하다가 그때는 그대로 넘어갔다. 당연히 내 이름은 진학자 명단에 그대로 남았다; 나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선생님이 추진할 생각이셨던 것 같다. 그 다음주 월요일 사진 찍으러 가는 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서서 작은형하고 신작로에서 보면 하천 건너 맞은 편 황씨네 호밀밭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오전 내내 보냈다. 그러면서 신작로로 중학교에 갈 아이들이 사진 찍으러 가는 걸 호밀밭에 숨어 내다보았다. 억지로라도 사진 찍게 하려고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실까 봐 학교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나와 숨었던 것이다. 그 일로 나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 나를 어떻게든 중학교에 진학하게 하려 하셨던 석관식 선생님은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나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한참 후배들, 나와 인연이 없었음에도 선생님이 얼마나 나를 안타깝게 여기셨는지, 아깝게 여기셨는지,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는 한참 후배들에게도 난 공부를 잘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을 만큼 그 선생님이 소문에 소문을 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으나 선택할 수 있었던 순간, 그러나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던 나,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는 공부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2학년 때 마음가짐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함으로서 나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중학교 진학을 했으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는 그 선택 아닌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지금의 삶이 어떠하든 나는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지금의 나로 만족하니까. 그 일로 보다 힘든 길을 걸어왔을지라도 지금의 나의 마음, 지금의 나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으니까. 오히려 이 삶이 감사하다. 선생님 앞에서 울던 아이, 호밀밭에서 신작로를 내다보던 아이의 흑백사진 같은 모습은 내가 아닌 어느 시골아이처럼 그려질 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가 나였음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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