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3- 타작하던 날!

영광도서 0 506

가을이면 신나는 날이 있었다. 타작하는 날이었다. 동네에 탈곡기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어느 개인 소유가 아니라 동네에서 돈을 모아 구입한 것이었다. 때문에 마을 어른들이 회의를 열어 타작하는 집을 날짜별로 정했다. 논농사를 적게 하는 집은 모아서 하루에 두 집정도 타작을 했다. 부잣집이라 할 만큼 논농사를 많이 짓는 집은 하루 종일 타작을 했다. 조금 운이 안 좋게 비가 오는 날에 잡히면 다음 날로 순연하는 식이었다.

타작 날이 좋았던 이유는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하얀 쌀밥을 먹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모여서 타작을 하기 때문에 우리 집처럼 논농사가 적은 집은 아침하고 새참 그리고 점심을 책임지거나 오후에 걸리면 경우에 따라 점심, 새참, 저녁을 책임지면 되었다.

새참은 막걸리와 함께 국수였다. 막걸리는 거의 집에서 담근 술이었다. 물론 밀주금지 시대였지만 암암리에 모두 옥수수 밀주를 담갔다. 모내기 하는 날이거나 타작하는 날, 어른들 생일이거나 특별한 날을 위해서 옥수수 술을 담그는 것 같았다. 가끔 밀주단속이 나오기 때문에 술을 빚으면 일단 감추어야 했다. 하여 외양간 뒤에 높게 쌓인 두엄 속에 감추었다. 그러면 두엄 속이 훈훈한지라 술이 아주 잘 익었다. 어쩌다 실제 단속을 나온 공무원은 봉양꽂이로 두엄 속을 푹푹 찔러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엄마와 아버지는 가슴을 조이곤 하셨을 터였다.

새참용 국수는 전날 미리 삶아 두었다. 가마솥에 많이도 삶아서 찬물에 헹구어 건져낸 다음 한 그릇 만큼씩 떼어 놓았다가 먹을 때 한 덩이씩 담은 다음 미리 준비한 오이를 숭덩숭덩 썰어 놓은 냉국을 부으면 되었다. 그렇게 먹는 국수 맛은 일품이었다. 여기에 옥수수 막걸리를 곁들여 어른들은 드셨다.

우리 집처럼 작은 농가 타작엔 우리 형제들만으로 충분했다. 어른들을 도와 탈곡기 옆에 탈곡기를 사용하는 어른들이 손에 잘 잡을 수 있도록 섬겨주는 역할이거나 벼가 다 떨린 짚단이 뒤로 던져지면 뒤에 쌓이지 않게 볏짚가리로 날라주는 역할이 우리 역할이었다. 그러다 새참 때나 식사 때 엄마를 도와 마당으로 부랴부랴 국수를 날라 오거나 막걸리 주전자를 가져다주는 역할을 우리가 맡았다. 가끔 어른들이 장난삼아 쉴 때쯤에 우리에게 탈곡을 직접 해볼 수 있은 기회를 주었다. 자칫 너무 볏단을 깊이 들이대면 탈곡기에 빨려 들어갈 번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그런 걸 즐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신나기는 했다. 와롱와롱 소리를 직접 내면서 벼를 떨어보는 기분은 아주 색달랐으니까. 아이들의 힘으론 탈곡기를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밟아서 탈곡기를 빠르게 돌려야 벼가 떨리는데 밟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손으로는 볏단을 다루어야 했으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들 중에서도 벼를 잘 터는 이들은 힘도 좋고 날랜 이들이었다.

어른들은 역할이 분담되어 있었다. 탈곡기를 다루는 어른들이 서너 조, 볏짚가리를 쌓는 어른 둘, 탈곡기 앞에서 수북하게 벼가 쌓이기 전에 벼를 긁어내어 볏더미를 만드는 어른 둘, 나머지 어른들은 볏단을 날라다 탈곡기 옆에 쌓거나 볏짚 나르기, 개중에는 어느 새 술이 취해 볏짚을 침대삼아 잠든 어른들도 있고, 잔소리를 하거나 재미있는 농담을 늘어놓으며 볏더미 앞에서 갈퀴질을 하는 어른도 있었다.

탈곡이 끝나면 수북하게 쌓인 볏더미를 보면서 몇 가마나 될지를 예측하는 어른들이 내기를 걸었다. 멀리서 달려오다 볏더미를 넘어보는 젊은이도 있었다. 그런 통과의례가 끝나면 어른들은 가마니에 벼를 담았다. 볏가마들이 쌓이고 나면 결과는 드러났다. 해에 따라 어떤 해는 생각보다 많아서 좋았을 테고, 어떤 해는 생각보다 적어서 아쉬웠을 것이다.

어렸을 적 내가 타작 날이 좋았던 것은 이런 과정들은 아니었다. 오로지 먹거리 때문이었다. 때가 되면 엄마를 도와 음식을 내오는 심부름을 하면서 새참으로 내온 국수 한 그릇을 후딱 비우는 기쁨을 맛보거나 쌀밥 한 그릇에 머우 무침이라든가 고등어구이를 먹는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지금은 어디서도 구경도 어려운 탈곡기, 세게 밟으면 밟을수록 소리가 달라져서 와롱와롱 소리 정도는 되어야 벼가 잘 털리던 탈곡기, 탈곡기 뒤로는 벼 떨린 짚단이 떨어져 나가고 장난을 좋아하는 탈곡하는 아저씨는 볏단을 치우는 우리에게 세게 던져서 ‘아얏’소리를 이끌어내고는 신나하셨지. 탈곡기 앞에 쌓이는 벼 한 톨 한 톨이 모여 볏더미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웃음을 짓고 때로는 아쉬워하는 모습으로 아버지는 뒷정리를 하셨지.

그래 그날은 금빛 날이었어. 쌓이는 벼들도, 쌓이는 볏짚들도, 하얀 광목옷을 입은 어른들도 금빛으로 변하는 날이었어. 상투적인 말이긴 하다만 그날이 그립다고 말해야겠지.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그때 그 아저씨들 한 번쯤은 그날 그 모습으로 보고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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