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5- 큰 재산이었던 소 기르기
“이 또한 지나가리라!”란 성경말씀이 있듯이 지난 것은 모두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픔이었든 기쁨이었든 상관없이 기억하는 모든 일은 그립다. 하긴 기억하는 일의 대부분은 아주 슬펐거나 아팠거나, 아주 행복했거나 즐거웠던 일들이긴 하다. 소소한 일들, 일상과 같았던 일들은 그냥 뭉뚱그려 그때는 그랬지 정도이지 세세한 심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일들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다. 비록 나 개인의 아리거나 신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지는 않아도 그 시대의 풍속사이기에 보다 가치 있는 일들이기도 하니까.
소는 어느 집에서든 큰 재산이었다. 집집마다 소를 길렀다. 그렇다고 소들이 그 집의 소유인 것만은 아니었다. 부잣집은 여러 마리 소를 직접 기르고도 벅차면 그 중 몇 마리는 다른 집에 맡겨 길렀다. 소 값은 집값보다 비쌌으므로 시골에서 집이 없는 사람은 없었고, 간혹 있다 치더라도 살 집이 없어 걱정하는 집은 없었다. 집은 없으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집터 잡아 놓고 지어서라도 주었다. 하지만 소는 그렇지 않았다. 소는 큰 재산이었으므로 누구나 소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소를 많이 소유한 부자는 기를 여력이 없으면 남에게 소를 맡겨 길렀다. 남에게 맡길 때의 조건은 맡길 때의 기본 가격을 치고 맡겼다. 송아지가 아니면 암소를 맡겼다. 송아지는 금방 자리고 자라는 만큼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었고, 암소는 더 이상 키워서 가격이 오르지는 않지만 송아지를 낳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었다. 소를 맡은 입장에선 운이 좋아 기본가격일 때보다 소 값이 오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불노소득처럼 돈을 벌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소 값이 하락해 일 년을 키워주고도 본전에 가까울 적도 없지 않았다. 암소는 그런 면에서 유리했다. 암소가 송아지를 낳으면 잘하면 송아지 반 마리는 내 몫이었으니까. 쌍둥이를 낳으면 한 마리는 당연히 내 몫이었다. 더 오래 기르면 암소라면 언젠가 내 소를 한 마리 소요할 수 있었다. 하여 어른들은 남의 소를 내 소처럼 정성스럽게 길렀다.
소를 파는 시기는 처음에 어느 정도 기한을 정하고 나중에 더 연기하거나 했다. 소를 팔 때는 적당한 시기를 정해 양쪽의 사정에 따라 정했다. 소를 더 이상 기르지 않고 돌려주겠다 싶을 때는 가격을 쳐서 기르던 소를 돌려주거나 값을 쳐서 살 수 있다면 내 소로 삼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큰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송아지를 소유로 삼을 수도 있었다. 돈이 궁하면 다시 가격을 쳐서 소를 맡아 계속 기르는 대신 중간정산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소는 농촌에서는 큰 재산이었다.
우리 집 역시 소유한 소가 없었다. 부잣집 소를 얻어 길렀다. 송아지를 데려다 기르기보다 암소를 얻어 길렀다. 물론 암소는 송아지를 낳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일 년을 기르고도 암소는 집에 아무런 보탬은 되지 않았다. 대신 주인의 양해 아래 암소는 밭갈이할 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때는 대부분 빌려서 기를 수 있는 소는 암소였고, 주인들 역시 암소를 남에게 맡기는 게 보편적이었다.
소는 재산이 동시에 큰 일꾼이었다. 소는 봄에 제일 고생을 많이 했다. 씨를 뿌리기 위해 논을 갈거나 밭을 갈 때 소를 이용했다. 큰 재산이라 소중하게 대하면서도 일을 시킬 때는 어쩔 수 없이 혹독하게 다루었다. 나 살 던 곳은 비탈 밭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소 두 마리를 이용했다. 비탈에서는 한 마리로 갈려면 소가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두 마리가 서로 밀어주는 힘 덕분에 균형을 잡을 수 있어서 두 마리를 이용했다. 이처럼 소는 재산인 동시에 큰 일꾼으로 농촌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아주 소중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소를 갖지 못했으니 남의 소를 길러줘야 했고, 소가 남으니 남에게 맡겨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더 부자가 되기 쉬웠고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누리는 사람은 더 누렸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기회를 박탈당했으나 박탈당하는 것조차 몰랐다. 기회는 평등하지 않았다.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다. 결과는 정의롭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소위 농업협동조합 돈이라든지 영농자금이라든지 저리로 나오는 돈은 가난한 이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돈은 모두 돈 많은 이들이나 또는 동네에서 유지임네 하는 이들이 서로 나누어 차지했다.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러다 보니 그런 이들은 싼 돈을 빌려서 그걸 이용해 돈을 불렸고, 가난한 이들은 사채를 얻어 빚에 시달렸다.
한때 축산자금이 나온 때가 있었다. 원래 취지는 가난한 이들, 소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이 그걸 받아 소를 사서 기르라고 나오는 돈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겐 누구도 보증을 서주지 않으니 화중지병이었다. 명색은 좋으나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은 아닌 셈이었다. 탁상공론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주어도 받을 수 없었던 반면 부자들이나 동네유지들은 그걸 받으면 다른 것에 투자할 수 있어서 그들에겐 큰 도움이었다. 가령 소를 사는 조건이니 자신이 가진 소 중에 한 마리를 구입한 것으로 명목을 정하고 이용했으니 법적으로 하자는 없었다. 그랬다. 그들끼리는 기회는 평등했다. 그들끼리 과정은 공정했다. 그들끼리 결과는 정의로웠다.
그들이 저리로 받은 돈을 우리는 그 돈을 빌려서 고리로 갚아야 했다. 만일 봄에 콩 한 말을 빌리면 가을에는 콩 한 말 반을 갚아야 했다. 명목상은 5부 이자라지만 실제로 기간을 따지면 일할은 족히 되었다. 그나마 가을에 갚지 못하면 복리로 계산이 되어 다음해 봄엔 콩 두 말 두 되 반에서 시작해야 했으니 한 번 못 갚으면 속수무책이었다. 가난의 늪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시 큰형 결혼시킨다고 빌린 쌀 한 가마니 값 때문에 나중에 쌀 6.75가마니 값을 치러야 했다. 도저히 갚지 못하고 외삼촌에게서 빌려서 갚고, 수년 후에 이자는 드리지 못하고 원금만 간신히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 땅을 갖기, 내 소를 갖기, 그 소망을 이루려면 남의 소를 맡아 기르는 수밖에 없었다. 기르는 암소가 제발 송아지를 낳아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최소한 일 년이라야 송아지 한 마리를 낳을 터이니 적어도 2-3년은 길러야 내 송아지 한 마리 얻을 수 있었다. 단 다른 곳에 돈을 안 써도 될 만한 상황이라야 했다. 내 소 한 마리 그렇게 소유하기가 어려웠다. 빈곤의 악순환이었다.
그때가 좋았다지만 돌아보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그런 모순을 당연하다 여겼기에 좋았을 뿐이었다. 아는 게 벼이라고 알면 좋았던 것아 아니라 모순이었다. 그들끼리는 평등, 공정, 정의로웠을지라도 우리에겐 정반대였다.
그들끼리가 아니라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에게 공정하고, 모두에게 정의롭기를. 이 캐치프레이즈는 어제 오늘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오면서 국가가 탄생한 이래 철학자들이 외쳐온 구호이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기회는 평등하기를, 과정은 공정하기를, 결과는 정의롭기를 염원한다. 지금 이 땅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우리가 내세운 캐치프레이즈가 자신과는 상관없이 그들만의 것으로 인식할지 생각하면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다른 기회의 평등을 누리고, 다른 과정의 공정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진정으로 가난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은 이런 모순을 생각조차 못한다. 말로는 그럴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