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6- 큰 일꾼이었던 소와 아버지의 노래

영광도서 0 546

요즘은 아파트 값 상승으로 논란이 드세다. 아마도 재산의 가치가 아파트로 평가되기 때문이어서 그런가 싶다. 누구나 내 집을 안정적으로 갖고 싶은 이유가 주겠지만 재산을 불리는 방법으로 아파트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에나 지금이나 재산을 불리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 없는 인간본능인데 어쩌랴.

 

나 어렸을 적, 시골에서 소는 큰 재산임과 동시에 큰 일꾼이었다. 사람들은 땅보다 소를 원했다. 땅이야 갖고 있어봤자 농사를 짓는 게 전부였다. 농사를 지어봐야 봄에 빌린 것 간신히 갚고 한 해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 못했다. 이에 비해 소는 잘만 자라면 농사를 짓는 것보다 큰돈을 만질 수 있게 했다. 그런 이유로 소는 땅보다 가치가 있었다. 부의 척도는 땅보다 소였다. 때문에 내 소를 갖고 싶은 욕망으로 가난한 집들은 남의 소 두어 마리를 길렀다.

 

남의 집 소였지만 소를 맡으면 내 소처럼 정성을 들여 기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소중하게 다루었다. 물론 남의 소를 길러줄 때는 거의 암소거나 송아지였다. 황소는 드물기도 했지만 함이 세고 사나워서 기르기가 어려웠다. 새끼를 낳을 수가 없으니 재산을 불리는 데에도 불리했기 때문에 내 소가 아닌 한 맡아 기르지 않았다. 남의 소를 데려다 키워서 송아지를 낳으면 내 소를 가질 확률이 높았다. 송아지를 낳으면 무척이나 기뻤다. 송아지의 반은 우리 것이기 때문이었다.

 

송아지는 세상에 나와 한나절만 지나면 뒤뚱거리며 일어선다. 그 다음부터는 어미 소의 젖에 코를 박고 머리로 어미의 배를 툭툭 쳐 올리면서 젖을 빨아댄다. 사람 이기와는 달리 송아지는 부쩍부쩍 자란다. 좀 더 자라면 엄마 풍에만 있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곤 한다. 이쯤에선 목에 밧줄을 매어 조금씩 관리한다. 조금 더 자라면 힘이 세서 잘 다룰 수 없다. 그때쯤엔 코를 꿴다. 코뚜레는 노간주나무를 여물에 삶아서 타원형으로 휘게 하여 사용한다. 물론 코를 뚫는 막대기 역시 노간주나무로 만든다. 노간주나무는 삶으면 아주 단단하여 부러지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들반들하여 딱 좋다. 코를 꿸 때는 소의 코 안에 손을 넣어 만지면 아주 얇게 만져지는 부분이 있다. 그곳을 확인한 다음 코를 뚫기 위한 끝이 뾰족한 단단한 꼬챙이로 갑작스럽게 소의 코를 뚫는다. 그리곤 불에 달군 꼬챙이로 뚫린 부분을 지지는 것으로 코 뚫기는 끝난다. 그 자리에 코뚜레를 건다. 처음엔 밧줄에 연결은 안하고 매달아 놓았다가 다루기 벅찰 즈음이면 밧줄에 연결한다. 이렇게 코가 꿰인 후엔 소는 꼼짝 못한다. 이런 통과의례를 거쳐 송아지에서 소로 거듭난다. 어른이 된 암소는 일소로 편입되어 일하는, 쟁기를 끄는 법을 배운다. 황소는 그럼에도 억세서 다루기 어려워 일소가 되지 못한다.

 

대신 동네에 아주 잘생기고 튼튼한 황소 한 마리 정도는 있었다. 소위 종무소였다. 마침 우리 동네 우리 옆 집 황씨네가 훌륭한 황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발정 난 암소가 생기면 이 집 황소와 교미를 시키곤 했는데, 우리 집 옆 야산에 교미장소가 따로 있어서 그 의미를 몰랐지만 가끔 묘한 구경을 하곤 했다. 황소는 잘 움직이지 못하도록 생나무와 생나무 사이를 건너지른 굵은 기둥으로 만든 틀에 암소를 고정 시키고 황소를 뒤로 데려가면 황소는 한두 번 시도 끝에 교미에 성공하곤 했다. 종무소가 귀했는지, 아니면 이 집 황소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났는지 1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동네에서 교미를 시키러 암소를 끌고 오기도 했다. 수고는 황소가 했지만 주인은 교미의 대가로 붉은 콩 두 말을 받았다.

 

드물긴 했지만 황소는 다루기 어려웠으므로 논을 갈거나 밭을 가는 일은 암소들의 몫이었다. 동네에선 봄이면 서로 겨린네를 조직했다. 보통 일을 할 수 있는 암소 중에서 비교적 덩치 크고 힘센 암소인 안소를 가진 집과 비교적 작고 힘이 좀 약한 암소인 말아소를 가진 집을 한 쌍으로 하여 조직했다. 일종의 두레라면 두레였고, 품앗이라면 품앗이였다. 이 결합에 소가 없는 집 한두 집이 한 겨린네에 들었다. 봄에 파종기에 논밭을 갈고 씨앗을 심기까지 이 조직한 한 가족처럼 움직였다. 소도 일꾼 한 사람을 쳤기 때문에 품앗이로 돌아갈 때엔 소가 없으면 대신 소를 소유한 집보다 한 사람이 더 일을 나가야 했다.

 

남부지방과 달리 우리 살던 곳에서 소를 두 마리로 논이나 밭을 갈았던 이유는 밭이 비탈이었기 때문이다. 경사가 심해서 소 한 마리가 쟁기를 끌려면 힘도 딸리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심을 잡고 서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소 두 마리가 서로 미는 힘으로 균형이 잡혀서 소가 쓰러지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소를 항상 두 마리로 쟁기를 끌게 했다. 안소는 말 그대로 이랑 끝에 이르면 쟁기를 다루는 이가 고삐를 당기면 힘으로 말아소를 이겨 안쪽으로 끌고 들어와야 했기 때문에 안소라 불렀다. 말아소는 조금 힘이 약해도 안소가 끄는 대로 끌려 돌면 되었다. 우리는 말아소를 기른 적이 있었고, 때로는 소가 없어 겨린내에 들어가서 봄을 보내곤 했다.

 

쟁기를 다루는 이는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면서 고삐로 안소와 말아소를 번갈아 부르면서 논이나 밭을 갈았다. 쟁기질은 무척 힘든 일이었으므로 그것을 이기는 방법이기도 했다. 구성진 노래는 온 동네를 가득 채울 만큼 들을 만한 그야말로 노동요였다. 특히 밭갈이 노래라면 우리 아버지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아주 잘하셨다. “이랴! 이랴! 안소야 어서 돌아서라. 말아소는 썩썩 물러서 돌아서라. 초승달 밭에 발 다칠라 정신 차려서 나가자!” 우리 아버지가 단골로 부르는 노동요의 일부였다. 평소엔 수줍어 말씀도 잘 안하시는 아버지였으나 논을 갈거나 밭을 갈 때는 무척이나 노래를 잘하셨다. 봄이면 계곡에 울려 퍼지던 아버지의 밭갈이 노래, 요즘 미스터 트롯에 버금가는 노래였다.

 

내 집 소 한 마리 가져보는 것이 꿈이었던 아버지, 그런 한을 밭갈이를 하면서 마음을 달랜 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소 이야기를 쓰다 보니 색 바랜 흰 광목 옷, 여기 저기 기운 곳이 있는 옷을 입고 비탈 밭에서, 해 저물도록 우렁찬 노래를 부르시면서 밭갈이를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메밀꽃 필 무렵>의 조선달과 허생원이 걷던 옆 메밀밭 같은 풍경이 그려진다. 마침 떠오른 초승달 걸린 하늘에 울려 퍼지던 노래가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아부지, 아부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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