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88- “개 혀?” 이 말이 무슨 뜻인고?
“개 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들도 꽤 있을 터다. 아재개그를 이해할 만한 이들은 반대로 이 말의 뜻을 알 것이다. 요즘을 사는 이들에겐 끔찍한 말일 테지만 지금은 인생의 저녁나절을 걷는 이들에겐 별 충격 없는 말일 것이다. 이 말, 요즘처럼 복날을 맞으면서 누군가에겐 군침을 돌게 하는 말, 누군가에겐 아주 충격적인 말이자 혐오감을 조장하는 말이기도 한 이 말 “개 혀?”는 농담 삼아 아재들이 하는 말로 영양탕을 먹느냐는 충청도식 표현이란다. 이전에는 아무런 충격 없이 평범한 음식이었던 영양탕이 지금은 입에 올리기도 무서운 혐오음식이라, 이런 질문을 받을까 겁난다.
그때도 시골과 도시에서 생각하는 개에 관한 문화는 달랐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시골에서 개는 소박한 재산이자 보신탕의 대상이었다. 소는 워낙 비싸서 소를 가진 집은 없어도 어느 집이든 개를 기르지 않은 집은 없었다. 소위 똥개를 길렀다. 줄을 매어 기르는 경우는 전혀 없었고 모두 놓아서 길렀다. 때문에 때로는 동네 개들이 몰려다니곤 했지만 때가 되면 개들은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소위 족보라곤 없는 개들, 집도 없이 마루 밑이나 처마 밑에 스스로 집을 정하고 개들은 잘도 지냈다. 먹거리도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들을 간신히 주었을 때였지만 개들과 주인과의 관계는 아주 돈독하기도 했다.
개를 길렀지만 개는 보신탕의 대상은 아니었다. 돈을 만들기란 어려웠던 시골에서 그나마 개를 기르는 이유는 어른들에겐 돈 때문이었다. 물론 아이들에겐 좋은 친구였지만. 개가 아이를 낳으면 보통 대여섯 마리를 낳았다. 그러면 강아지 전부를 기를 수는 없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그 중에 일부를 다른 집에 팔아서 용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개를 길러 큰 개가 되면 개장수한테 팔면 제법 돈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시골에서 개를 기르는 이유는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가끔 개장수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족고개를 넘어왔다. 오토바이 뒤에는 사방이 철창으로 이루어진 개집을 싣고 있었는데, 동네 개들은 오토바이 개장수가 들어오면, 오토바이 소리만 들리면 어디론가 용케도 알고 숨었다. 평소엔 그토록 잘도 짖던 개들은 용케도 개장수를 알아차리고는 짖지도 않은 채 어디론가 숨곤 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해서 개를 팔 때가 되면 그때에야 개를 미리 붙잡아 묶어 두었다가 개 장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소리를 질러서 팔 개가 있음을 알려서 개를 팔곤 했다. 그렇게 개들은 소박하다면 소박한 돈벌이의 수단으로 길러졌다.
보다 잔인한 개의 운명은 보신탕으로 선택받는 일이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고 일 년에 한 번 동네에선 개 한 마리가 희생당해야 했다. 봄 내내 농사에 시달리던 어른들은 몸보신을 위해 개를 잡았다. 새벽부터 논이나 밭에 나가서 종일 일하고 어두워야 일터에서 돌아와 잠간 밤잠을 자는 반복으로 농번기를 보내야 한 어른들은 어느 한 날을 잡아 한 곳에 모였다. 소위 철엽이었다. 그런 날은 동네에서 개 한 마리를 잡았다. 동네 개들 중 가장 살진 개를 한 마리 선택하여 주인에게 돈을 거두어 주고 그 개를 잡았다.
잡는 방식이 잔인하여 나는 직접 구경한 적은 없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았다. 물론 끔찍한 개의 비명 소리를 들어야 했다. 선택당한 개는 어른들에게 끌려, 그야말로 개 끌려가듯 죽을힘을 다해 버티며 강제로 끌려갔다. 끌려간 개는 해마다 개를 잡곤 하는 냇가 나무에 목을 매달려야 했다. 개는 쉽게 죽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개는 대롱대롱 매달려 몸을 뒤틀었다. 그토록 구슬프고도 애처로운 개의 비명소리는 어찌나 큰지, 온동네를 울리며 들렸다. 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거의 한두 시간을 그렇게 버티며 소리를 지르다 마지막으로 똥 한 번 눕고 단말마와 함께 이풍진 세상을 떠났다. 마냥 자유로울 줄만 알았던 세상을 개는 그렇게 목을 매달려 죽었다.
그렇게 잡은 개를 동네어른들은 냇가에서 손질을 하여 개 고깃국을 끓여 먹음으로써 거창한 철엽을 마쳤다. 물론 철엽에는 모처럼의 쌀밥이 있었고, 2리터 들이 25도나 되는 소주도 있었다. 개고기를 먹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엔 요리를 돕는 동네아주머니들과 동네 아저씨들만의 자리였다. 아주머니들 중에도 개고기를 먹는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순전히 동네 아저씨들을 위해 봉사를 하는 셈이었다.
철엽이 끝나면 조금씩 나누어 집으로 가져갔다. 아버지 역시 그것을 가져왔지만, 아버지 혼자만을 위한 음식이었다. 그릇도 따로 썼다. 처리하는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음인지 개고기를 끓인 그릇은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아주 정성스럽게 씻어야 비린내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럴 때엔 아버지 혼자 따라 식사를 하셔야 했다.
지금은 혐오식품으로 취급 받는 개고기는 그때는 보신탕이었다. 돈 때문에 길렀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먹을 수 있는 식품이었으니 어른들에겐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음식, 아주 진귀한 음식이었다.
아이들의 사랑은 받았으나 어른들에겐 돈벌이의 대상이거나 몸보신을 위한 희생물이었던 개, 한 번도 방안에 들어간 적이 없이 밖에서 길러졌던 개, 지금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시대의 산물이라면 산물이고, 지방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문화라면 문화이니,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그러하니, 지금은 지금의 문화와 관습을 따를 뿐이다. “개 혀?” 보신탕 먹을 줄 아느냐는 이 짤막한 충청도식 물음, 누군가 내게 지금 “개 혀?”라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