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5- 글을 아는 게 힘이건만

영광도서 0 495

“X가 고기 맛을 알면 J에 빈대도 안 남아난다.”는 말이 있듯이 글도 배운 사람이 글을 배워야 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글은 몰라도 손가락으로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만 할 수 있다면 그럭저럭 세상은 살 수 있다고 믿으면 그뿐이다.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배움이 필요하다는 걸, 글이 참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글은 배울수록 더 배우고 모르면 아예 배울 필요를 못 느낀다.

 

나 때는 그랬다. 글은 쓰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글을 못 써도 말을 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여겼다. 물론 글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터이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크게 불편을 몰랐다. 해서 어른들은 아이들이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그 다음에는 딴 생각 말고 농사일이나 열심히 하면 모범청년으로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덕소나 구로공단에 가서 취직해서 돈을 벌어오면 그것을 효도로 여겼다. 어른들이 글을 모르니까 글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동네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거의 없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동네 반장도 글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명색만 반장을 하고 글로 정리할 것은 아이들이 대신하면 되었다. 이장이나 이서기 정도는 되어야 글을 쓰고 읽었다. 초등학교 졸업한 이들이면 이장이나 이서기가 가능했다. 이장을 맡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어서 이장 선거도 치열했다. 중학교 졸업자 출신이라면 거의 이장에 당선되는 건 따 놓은 당상일 정도로, 이장도 초등학교는 나오고 글씨를 좀 쓸 줄 알고, 글을 읽을 줄 알고 똑똑하면 가능했다.

 

우리 부모님 역시 글을 모르셨다. 엄마는 전혀 읽을 줄도 모르셨고 쓸 줄은 더 더욱 모르셨다. 아버지는 간신히 읽고 쓰기는 받침은 틀리면서 몇 자 정도는 쓰셨다. 부모님이 글을 모르시니, 이런 서류 저런 서류 신고는 동리 이장이 대신해주었다. 특히 출생신고는 이장이 대신해주었다.

 

그래서였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였거나 나 역시 원래 나이보다 한 살 어리게 호적에 등록되었다. 다른 이유라면 그때는 태어나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갓난아기 때 죽는 일이 꽤 있었다. 그래서 일단 일 년을 살아남아야 그제야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경우도 그런 경우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도 모른 채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원래 생년월일로 있었다. 학교에서 학년마다 주는 생활통지표에도, 졸업장에도 그대로 였고 그렇게 알았다. 나중에 신체검사할 때에야 한 살 줄었다는 걸 알았다.

 

작은형은 항상 광현이라 불렀다. 출생신고도 그런 줄 알았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기록했고 집에서는 그렇게 불렀고 적어도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올 때까지 광현으로 살았다. 나중에야 남현이었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갑자기 이름을 바꿔 부르려니 어색했지만 수년이 흘러 자연스럽게 광현은 기억 저 밖으로 사라졌고 남현이 남았다.

 

그러다보니 잘못 신고하는, 치명적인 사건도 있었다. 내 동생은 분명 남자이건만 여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전혀 몰랐다. 그냥 남자로 지냈다. 그런데 중학교 진학하려니 그제야 주민등록 초본인지 등본인지가 필요했었나 싶다. 여자 아이로 신고가 되어 있었다. 그걸 고치려니 고치는 방법을 알 수도 없었고 깜깜했다. 그것 역시 이장이 해결해주어야 했다. 절차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나 복잡한 것 같았다. 하루는 이장이 동생을 데리고 함께 갔다. 법원에 가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녀온 동생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더니 판사가 앞으로 오라더니 바지춤을 내려 보라고 내려서 보여주었더니 됐다고 했다고 했다. 그렇게 호적상 여자로 살던 동생은 원위치를 찾았다. 잘 못 신고한 그 일로 콩 두 가마를 팔아 비용을 대야 했으니 무지의 대가는 어쩔 수 없었다.

 

글을 모르는 엄마와 아버지뿐 만이 아니었다, 동네 어른들 대부분 그랬다. 하여 비교적 똑똑했던 나는 동네 어른들 편지를 대신 써주거나 읽어주는 일을 많이 했다. 어디서 편지가 오면 동네 어른들이 가지고 와서 읽어달라고 하면 나는 또박또박 읽어주었고, 편지를 써달라면 어른들이 부르는 대로 서 드렸다. 물론 처음 시작하는 글은 내가 아는 대로 썼으니 “춘계지절에 기체일향후 만강하오시며” 같은 상투적인 문구들은 우선 필수로 써 놓고 다음부터 불러주는 대로 쓰면 되었다.

 

기특한 나를 보신 엄마는 직접 도움은 주지 못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떻게든 내가 공부하는 걸 도우려 애쓰셨다. 엄마는 글을 배운 적은 없으셨지만 교회에 다니시면서 찬송가와 성경을 늘 가지고 다니시더니 다른 글은 못 읽으셔도 나중엔 찬송가를 읽으셨고 성경도 더러는 읽으셨다.

 

글을 아는 것이 얼마나 힘인지 몰랐던 시절, 그리고 그때 그 사람들, 몰라서 더 순박했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몰랐지만 그때 어른들은 보다 인간다웠고 보다 인정이 많았다. 식사 때 지나가는 이가 있다면 강제로 들어오게 하여 밥을 대접했다. 우리 먹을 것이 부족해도 식사 때 지나가는 행인을 그냥 보내지 않았던 그 시절, 무지했지만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시절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주욱 쓰면서 그때마다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오늘처럼 보편적인 동네 이야기를 하노라면 동네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특히 내 동생을 데리고 내 일처럼 여기 저기 다니면서 멀리 춘천지방법원에까지 데리고 가서 문제를 해결해주던 정이장님,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똑똑 소리가 떨어지던 이장님의, 때로는 엄하면서도 뭔가를 도울 때는 책임감을 갖고 똑 부러지게 일을 해결해주던 이장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훈훈한 인정의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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