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8- 내가 살던 초가집엔
기억과 기록, 기억은 나만의 것으로 남는다. 기록은 동시대를 산 이들, 공유한 추억을 남긴다. 때문에 나는 기록한다. 대단한 사람들은 내가 기록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서로 기록한다. 그것은 역사다. 사실 역사는 나와는, 민초와는 직접 영향이 없다. 우리 같은 민초에겐 누가 왕이건 누가 지도자건 그다지 상관이 없다. 실제로 그들만의 이해관계인데 백성을 이용하고 민초를 이용할 뿐이다. 그들은 누군가 기록해준다. 하지만 우리 민초들의 삶은 우리 스스로 기록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건 아닐 수 있지만, 한 시대의 풍속사이기 때문에 나는 기록하련다. 나의 기록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온 공유의 기록이니까. 라때, 동시대를 산 이들의 기억엔 남았을, 그럼에도 기억에만 남았을 뿐, 누구한테도 보여줄 수 없으니 나는 기록한다.
네 살 내 생일 날 이사 온 집, 그 집은 우리 소유였다. 그 집에서 정확하게 나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까지 살았으니 10년을 살았다. 신작로를 앞으로 건너다보는 곳에 자리 잡은 집이었다. 백우산 발치이긴 했으나 언덕 위라 할 수는 발치 허리쯤에 자리 잡았다. 아래로는 우리 밭이 펼쳐졌고, 좌측엔 야산, 우측엔 20여 미터는 우리 밭이 둘러쌌고, 그 이상을 지나면 건너편 부잣집 허씨네 밭이 둘러싸고 있었다. 집 뒤로는 오십여 미터는 우리 밭이었으나 그 위로는 면 소유 땅이라 비탈 밭이긴 했으나 경작할 수 없어서 드문드문 보득솔이 나와 자라고 바닥에는 금잔디가 자라거나 키 작은 잡초가 뒤덮인 밭이 이어졌다. 그 밭이 끝날 지점에서 산은 급경사를 이루며 백우산으로 접어들었다.
당시에 모든 집이 그렇듯이 우리 집 역시 초가집이었다. 해마다 억새를 베어다 이엉을 엮어 덮거나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었기 때문에 항상 지붕은 두꺼웠다. 마치 해마다 썩은 농도가 다른 층이 드러나 나이를 자랑하듯 보였다. 물론 때로는 어느 해엔 어느 정도 지붕의 두께를 벗겨내고 새 지붕을 올려야 비가 덜 새기 때문에 조금 얇아지는 때도 있었다. 썩은 농도가 달라 층이 보이는 지중 속에는 손가락만한 굼벵이가 더러 떨어지기도 했고, 지렁이들이 떨어지기도 할 만큼 벌레들이 깃들어 살았다.
집 좌측에는 곡식을 떨기 위한 옆 마당이 있었다. 그 마당 끝에 매번 밥을 지을 때마다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을 시작으로 배불뚝이 황토벽의 집이 이어졌다. 윗방과 아랫방으로 방 두 개가 이어진 다음엔 부엌, 부엌과 맞닿아 기억으로 꺾인 자리에 외양간이 자리 잡았다. 외양간에서 검붉게 우러나는 흘러나간 소 오줌, 외양간이 끝난 그곳에 좁은 길만 나 있고 그 뒤에 두엄더미가 자리 잡아서 신작로에서 보면 외양간은 보이지 않는 형국이었다.
안채가 이렇게 자리 잡고 섰다면, 마루는 없이 방 앞에는 댓돌 하나 놓였고 그곳이 봉당이었다. 봉당은 제법 높아서 2미터는 족히 되었다. 봉당이 높아서 앞에 사랑채가 있었지만 건너편 신작로가 내다보였다. 덕분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거나, 투박한 트럭이 가는 소리가 울려대면 얼른 나와 신기한 듯 구경하곤 했다.
봉당에서 내려서면 좁은 앞마당이 있었고, 앞마당을 경계로 안채와 마주보는 사랑채가 있어서 얼추 디귿자형을 이루었다. 사랑채엔 역시 좁지만 부엌이 있어서 가끔 나그네가 우리 집에 한동안 머물다 가거나 농토는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들어 함께 살다 떠나곤 했다. 기억에 남는 집이라면 작은누나보다 위로 보이는 성남이 누나, 시골처녀 치고는 세련된 누나 네 모녀가 살다가기도 했고, 착하디착한 나보다 여섯 살 위의 김현이 형네 모녀가 살다 갔고,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약초 캐는 아저씨 한 분, 날마다 특이하게 생긴 봉양자루에다 봉양 캐는 데 쓰는 송곳처럼 생긴 긴 쇠꼬챙이를 가진 아저씨도 들어와 살았다. 가끔 봉양을 캐서 가지고 와서 보여주면서 유쾌한 웃음을 유도하던 아저씨였다.
사랑채가 끝나는 곳에 토끼장이 있었다. 토끼장은 건물은 아니었고 나무를 베어다 얼기설기 짜고 철망을 구해다 짠 것으로 나름 이층집이었다. 그렇다고 높거나 큰 건 아니었고 토끼가 들어가 살면 되었으므로 한 칸의 넓이라야 사방 일 미터, 높이는 두 자 정도나 될까 싶었다. 그렇게 세 칸씩 이층이면 여섯 칸 이동 가능한 구조였다. 장정 넷이면 적당한 자리로 이동이 가능했다.
주로 앞마당에서 가족고개 쪽이 정문인 셈이었다. 야산과 작은 도랑을 경계로 길이 뻗어 야산을 타고 가족고개 쪽으로 길은 이어졌으니 장날이면 이 길로 가야 했다. 반면 외양간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지나면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잿간이 있었고, 이 길로는 마을로 향했다. 마을로 향하는 길은 잿간 뒤로 해서 우측으로 이어졌고, 잿간 뒤로 신작로로 바로 향하는 길이 언덕 아래로 뻗어 나갔고, 좌측으로 난 길은 우리 집에서 이어지는 밭 사이를 지나 정문에서 뻗는 길에 이어졌으니, 우리 집에 들려갈 사람은 도랑을 따라 들어오면 되었고, 그냥 지나가는 이들은 이 길로 해서 잿간 뒤를 거쳐 안쪽으로 갈 수 있었다. 이 길로 중학생 누나가 몰래 지나다니곤 했다. 그리고 옆 마당에서 야산 쪽으로 위로 난 길이 백우산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사랑채에 손님이 안 들고 창고로 쓸 때 감자를 가러 들어갔다가 동생을 엎고 도망을 치면서 달린 길이 이 길이었다.
별로 다른 특징이 있거나 한 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십 년 동안 살았던 집이었으니 많은 추억이 함께 깃든 집이었다. 거센 비가 내리면 누렇거나 검붉은 지시랑물이 떨어지고, 지시랑물 떨어지는 앞마당엔 개미귀신 집 마냥 구멍, 외양간 벽을 타고 오른 박이며 호박 덩굴에 여기 저기 달린 호박이나 박들, 특히 가을쯤이었을까? 달밤이면 달빛에 더욱 희게 보이는 하얀 박들,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을 연출했다.
이젠 기억을 호출해야만 심상으로 남은 내 오랜 고향 집, 어디에 가도 같은 모습은커녕 비슷한 모습의 집도 볼 수 없어 아쉽다. 그나마 어쩌다 보존한 초가집을 보면 정겹다. 그런 집을, 초가집을 볼 때면 항상 내 마음엔 하얀 박들이 하얀 달빛을 받아 유난히 희게 아름다웠던 풍경이 떠오른다. 지시랑물 떨어지는 봉당에서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어 빗물을 묻혀대며 놀던 때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그리움을 만난다. 잃어버린 고향 집의 그리움, 그 집에 함께 살던 우리 가족들, 그리고 사랑채 손님들의 얼굴 하나하나 떠오른다.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그저 그리움이란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