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0- 초등학교 졸업식 풍경

영광도서 0 553

지금도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려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내 기억으로는 졸업식 노래 1절 가사가 대략 이렇게 되는 것 같다.

 

졸업식, 초등학교 졸업식은 대단한 행사였다. 전교생이 한 곳에 모였다. 강단을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엔 선생님들 자리와 내빈석이었다. 마을 유지들이 점잖은 모습으로 자리를 메웠다 맨 앞자리는 졸업생들을 위한 자리였다. 졸업생들 뒤로는 학생들이 질서 있게 줄을 맞추어 앉았다. 여학생들 자리와 남학생들의 자리는 반으로 갈라져 따로 앉다시피 했다. 그 뒤로는 학부형들이 자리했다.

 

식순에 따라 졸업식이 진행되고 학생 대표가 나와서 구구절절 슬픈 내용을 낭독하면 졸업생 석에서는 물론 후배들 자리에서도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서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더 슬프게, 심지어 답사를 하는 졸업생이 울먹이면 학부형들마저 울어서 졸업식은 울음바다를 연상하게 했다. 졸업식은 축하의 자리가 아니라 슬픔의 자리였다.

 

어느 즈음에 내빈 소개도 있었고, 시상식도 이어졌고, 교장 선생님의 축사도 있었을 터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후배들의 축사와 졸업생의 답사 그리고 졸업식 노래가 전부였다.

 

식의 마무리 즈음에 부르는 졸업식 노래, 1절은 학교에 남을 후배들이 불렀다. 1절에 이어 졸업을 할 학생들이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로 이어받아 노래했다.

 

이 노래를 부를 즈음엔 졸업하는 학생들 속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내가 1학년 때 참석해서 후배로서 노래를 부를 때엔 졸업생 거의 모두가 울어서 나마저 괜히 슬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졸업이란 게 슬픈 거구나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괜히 슬픈 졸업식이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이 대목에서 시작된 울음소리로 졸업식, 노래를 잘 잇지 못하는 선배들의 울음 섞인 음성으로 졸업식은 서글펐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울음이 농도가 점점 옅어졌다. 4학년 때 참석했을 때 선배들 중 남자 선배들 중 우는 선배는 대여섯 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여자 선배들은 누구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울었다. 5학년 때엔 남자 선배들 속에선 울음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졸업할 때엔 우리 반 아이들 중 남학생들은 우는 아이는 없었다. 여자 아이들 중에 우는 아이는 절반을 조금 넘은 것 같았다. 남들이 우니까 덩달아 우는 아이도 제법 있는 것 같았다.

 

2절 가사는 분위기에 따라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면, 3절이 시작되면서는 진정 기미를 보였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로 졸업식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랬던 자리에, 졸업생들 자리에 우리가 앉았다. 매번 뒷자리에 앉았다가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니 어색하긴 했다. 그것 빼고는 예전이나 달라진 건 없었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 모두 강당을 중심으로 우측에 자리 잡았다. “똥마려울 때 뭐가 약인 줄 알아?”라고 묻고는 대답을 못하자 “싸는 게 약이지”라고 웃음을 주었던 학교 아저씨라고도 하고 소사아저씨라고도 하는 이상철 아저씨도 선생님들 맨 끝자리에 앉았다.

 

후배들이 졸업식 노래 1절을 부르고 2절은 우리 차례였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이쯤에서 여학생들 자리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남학생들 자리에선 하나도 울지 않았다. 또한 지난해와 달리 여학생들 중 일부는 울지 않았다. 변화라면 그게 변화였다. 물론 남들이 우니까 울어야 하나 싶어 따라 우는 척하는 여학생들도 있긴 했다만 세월의 흐름

 

따라 슬픔의 농도도 옅어지나 싶었다.

 

그 졸업식, 한 번도 학교를 방문한 적이 없던 학부모라도 졸업식엔 모두 참석한 졸업식, 우리 엄마 역시 그러했다. 운동회날도, 소풍날도 학교에 오시거나, 학부모들 모임에 오시거나 한 적이 없었다. 내 졸업식엔 오셨다. 우등상으로 받은 10원짜리 깍두기 노트 두 권을 보시곤 흐뭇해하셨다. 졸업식 기념으로 건빵 두 봉을 사주셨다.

 

우리 졸업한 친구들 49명 중 아홉은 중학교에 진학할 터였다. 나를 비롯한 나머지는 도회지에 나가 공장살이를 하거나 농사를 지을 터였다. 나 역시 농사꾼의 길을 걷기 시작할 터였다.

 

이렇게 나의 유년 시절의 추억도,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도 마감이다. 돌아보면 숱한 기억들이 있을 법한데, 뚜렷이 기억나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슬픈 기억이 많다. 즐겁던 일, 재미있던 일들도 많았을 텐데, 기억은 즐거운 일은 지우고 슬프고 쓸쓸한 일만 많이 기억하나 싶다. 그런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데 일조했을 터이건만.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그 노래로 교문을 나선 지 어언 수십 년, 이제는 내가 다닌 학교, 그때는 전교생 340명이었는데, 점차 줄어든다더니 분교가 되었다가 완전히 폐교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꽤 오래다. 기억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 살던 마을도 어쩌면 많이 변했으리라. 다시 복원할 수 없는 모습으로. 그래, “ 새 나라의 새 일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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