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2- 산림간수의 오토바이 소리
요즘은 경찰관을 봐도 무섭지 않다. 법을 어긴 일이 없다면 굳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복을 입었으니 경찰관은 알아볼 수 있을 뿐, 다른 업종의 공무원들은 알아볼 수도 없으니 무섭지 않다. 물론 동사무소에 가면 창구에 앉은 공무원들을 만난다만 그들이 무섭지 않다. 공무원도 나와 같은 국민이고 직업이 다를 뿐임을, 공무원이라고 내 위에 군림하는 것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어렸을 적, 나 살던 마을엔 공무원은 아주 대단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공무원이긴 했으나 공무원이라기보다 선생님으로 존경했다. 우체부 아저씨 역시 공무원이었으나 무섭지는 않았다. 경찰관은 구경조차 못했으니 역시 두려운 존재는 아니었다. 참으로 무서운 공무원 두 종류가 있었으니 면서기와 산림간수였다.
비포장도로, 간신히 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신작로, 중간 중간 구간에 따라 어쩌다 트럭이 오가는 바람에 바퀴자리엔 풀이 없으나 가운데엔 수북하게 풀이 자라는 신작로로 간혹 오토바이가 들어왔다. 유난스럽게 산야를 울리면서 가족고개를 넘어오는 오토바이, 그 주인공은 산림간수였다. 산림간수가 들어오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 모두 긴장했다. 이유인 즉, 나 살던 곳의 산은 거의 모두 국유림이었다. 모든 땔감은 국유림에서 구해야 했다. 어쩌다 집을 고치거나 집을 지으려면 목재 역시 국유림에서 몰래 마련해야 했다. 산림간수가 마음만 먹고 이 산 저 산 들어가서 건수를 올리려면 걸리지 않을 집이 없었다. 그러니 산림간수만 뜨면 마을 사람들 모두 긴장했다.
산림간수라고 우리는 불렀지만 영림서 소속이었다. 담당은 한 사람이었는데, 평소에는 구경도 못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곤 했다. 우체부 아저씨는 붉은색 자전거에 우편물을 싣고 고개를 넘어오느라 무척 애를 쓰면서 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달릴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무척 고생하면서 다녔다. 면서기는 서류 봉투 하나 달랑 들고 걸어서 고개를 넘어왔지만 막상 마을 사람을 대하면 원님행세를 했다. 특히 오토바이를 타고 폼 나게 고개를 넘어온 산림간수는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땔감을 마련할 때는 갯가에 가시덤불이나 잡목을 채취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크지 않은 잡목들을 간목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이미 커서 굵은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도 자르면 안 되었다. 얼추 자란 소나무나 낙엽송은 손대면 안 되었다. 그대로 살려두고 소나무엔 기어 올라가 나뭇가지만 잘라서 땔감으로 쓸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혹시 나무라도 한 그루 베었다가 산림간수한테 들키면 어떤 벌을 받을지 몰라 무서웠다.
뿐만 아니라 국유림 속엔 몰래 화전을 만들어 경작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산 속 한가운데 밭이 있으니 그냥 신작로로만 다니면 들통 날 일은 없었으나 혹시 마음먹고 산림간수가 산을 뒤지면 꼼짝없이 들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집을 고칠 때면 벽을 세우거나 서까래용으로 매출한 나무나 쭉쭉 뻗은 낙엽송을 잘라다 써야 했다. 새로 집을 짓는 경우에도 그때엔 모든 재료를 산에서 마련했다. 미리 기둥감이나 서까래 감을 산속에 준비했다. 생나무를 들키면 큰일 날 일이었으므로 산속에 집지을 재료를 베어서 숨겨두었다가 어느 정도 검게 변한 다음 몰래 이동하여 집을 짓거나 수리하거나 했다. 어느 집이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누구 하나 고발할 생각도 않았다. 그야말로 관습이었다. 그러니 어느 집하나 산림법에서 자유로운 집이 없었다. 때문에 오토바이 소리만 들리면 모두 긴장했다.
그날은 가장 바쁜 게 반장이었다. 반장과 몇몇 마을 유지들은 오토바이만 넘어오면 재빨리 우리 마을의 중간쯤 되는 막거리에 모였다. 막거리엔 신작로 옆에 붙은 집이 하나 있었고 도랑 건너에 4H회관이 있었다. 그 위 언덕에 신작로 옆에 4H비석이 있었다. 막거리 집엔 제법 넓은 마루가 있었다. 이곳에서 마을사람들 중 유지들이 모였다. 그날은 여지없이 살진 토종닭을 잡았다. 산림간수를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집집마다 닭을 기르긴 하지만 평소엔 닭을 잡아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특별한 날에라야 닭을 잡아 고기를 발라서 무국에다 올려 놀아 주는 정도의 닭고기 국을 먹었고, 길렀다가 장에 가서 팔아서 돈을 바꾸곤 했다. 그런데 산림간수가 뜨는 날이면 백숙을 만들어 극진하게 대접해야 했다. 덕분에 마을 유지들과 반장은 그 기회에 백숙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가끔 신작로로 오토바이 소리 요란하게 넘어오던 산림간수, 무척이나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마을 유지들의 접대 덕분인지 산림법 위반으로 마을에서 곤욕을 치루는 일은 없었다. 그때는 산림간수는 아주 무섭다, 아주 높은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기하긴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오토바이를 가까이서 구경도 못했다.
두려운 사람이 많았던 시절, 지금은 그에 비하면 무서운 사람이 없어서 좋긴 하다만, 요즘은 삶의 조건이 더 무섭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는 산림간수에 비할 바가 아니다만, 아마도 그때는 산림간수가 주는 공포감 역시 코로나 못지않았을 듯싶다. 어느 시대건 두려움의 대상이 없는 적은 없는 것 같다. 코로나 시대에 살다보니 차라리 사람 두려운 시절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마스크를 언제까지 써야할지 두렵고 언제까지 집콕을 해야 하는지도 두렵다. 차라리 산림간수 오토바이 소리 요란하게 넘어오던 그 시절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