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5- “그때 왜 그러셨어요?”
사람은 무엇이든 가벼운 것을 무겁게도 하고, 무거운 것을 가볍게도 만든다. 이 모두가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그대로 믿는가 하면, 다른 이의 정의를 불의로 둔갑시켜 낙인찍기도 한다. 사람은 참 잔인하다. 지상에 존재하는 동물 중 가장 잔인한 존재가 인간이다. 어떤 계기가 사람을 그렇게 몹쓸 존재로 만든다. 소위 완장이다. 완장을 차면 갑질하려 들고, 완장으로 다른 이를 제압하려 한다. 비록 완장은 가벼우나 완장 하나로 분위기를 무겁게도 한다.
지금은 공무원이라고 해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지만, 이전에는 무척이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두메산골에서 어떻게 공무원이 되는 줄도 몰랐고, 공무원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몰랐다. 그들이 어디서 생활하며 그들의 역할이 얼마나 힘을 가졌는지도 몰랐다. 그냥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고, 깍듯이 대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사람, 소위 면서기가 있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뚜렷이 기억에 남은 이미지와 이름, 키는 작달막했다. 딱 한눈에 야무졌다. 인정이라곤 눈매에 들어 있지 않았다. 항상 지팡이인지 막대기인지 들고 다녔다. 면서기가 뭔지 몰랐지만 한 번 나타나면 온갖 협박성 발언을 했다. 그 이름 박0규,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물론 우리가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는 알고 보면 범법자였다. 나 살 던 곳에 산들은 거의 모두 국유림이었다. 산발치로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땅들이 있었다. 소위 묵밭이었다. 이 밭들은 거의 면유지였다. 면서기는 이 밭들을 관리했나 싶었다. 그런데 이 밭들은 면에 세금을 내면서 농사를 짓기엔 비경제적이었다. 해서 대부분 묵밭으로 있거나 여기 저기 보득솔이 난 산으로 변했다.
농민에겐 땅은 너무 중요했다. 내 땅을 갖지 못한 이들에겐 땅은 더욱 절실했다. 그렇다고 당장 땅을 살 수도 없었다. 돈을 만들려면 씨를 뿌리고 결실을 맺기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일단 땅이 있어야 했다. 하여 가장 쉬운 방법은 화전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산 속에 평평한 지역이 있으면, 그곳에 빙 둘러 화금을 긋고 화전을 만들었다. 낮에는 연기가 나니까 밤이면 화금을 근 다음 위에서 불을 놓았다. 불은 위에서는 서서히 내려오면서 타기 때문에 급격하지 않았다. 반대로 밑에서 타는 불은 엄청나게 거세게 타기 쉬웠다. 때문에 화전을 만들 때엔 치밀한 계획을 하고 서서히 불이 타도록 균형 있게 불을 여기 저기 끌고 다니면서 불을 놓아야 했다. 아버지도 그렇게 화전 한두 개를 얻었다. 산속은 국유림이어서 문제가 없었다.
화전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반해 늘 면유지는 유혹의 대상이었다. 면유지는 사유지와 경계를 이루면서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우리 땅을 경작하면서 슬그머니 밭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농사를 지었다. 화전을 경작하든 면유지를 경작하든 관습처럼 동네에선 하등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우리는 우리였으니까.
그런데 면서기 박씨는 늘 지적도를 갖고 다니면서 감시를 했다. 간신히 반장이 면서기가 뜬다는 정보를 알려오면 우리는 위장작업을 해야 했다. 감자가 제법 자랐을 때이니 그렇다고 파서 버릴 수도 없었다. 그럴 때면 묵밭에서 마른 풀들을 베어서 밭을 덮어야 했다. 여기 저기 보득솔을 파다 심어 놓아야 했다. 아주 가까이 다기오지 않고 멀리서 얼핏 보고 지나면 별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굳이 면서기가 현장에 까지 와서 보면 들통 날 수밖에 없었다.
잘 위장은 했지만 한 번은 딱 걸리고 말았다. 면서기는 삽으로 여러 포기를 파 집어 던졌다. 사정을 이야기해도 상관없었다. “당장 내일까지 다 파 업고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콩밥 먹을 줄 알라”고 협박을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 아버지와 우리는 잘 자라고 있던 감자밭 한 때기를 모두 파서 버린 다음, 마른 풀을 베어다 완전히 덮었다. 중간 중간에 보득솔을 심어서 묵밭으로 만들고야 무사히 넘어갔다. 그 후로는 면유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론 불법이었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집들도 면서기 박씨가 드나들면서 면유지 경작을 포기했다. 악명 높은 그를 감당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아쉽긴 했지만 면유지를 이용하지 않으면 되었으니까. 때문에 그에겐 닭 한 마리 잡아주는 경우는 없었다. 숱한 면유지는 그냥 산으로 변해갔다.
우리의 잘못이었지만 지금도 협박을 하면서 콩밥을 먹이겠다던 박씨 아저씨의 모습이 생생하다. 면서기가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싶었던,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고 다른 나라에서 온 듯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박씨 아저씨,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였을까, 아니면 속절없이 당하시던 아버지의 비참함, 마치 살인죄라도 진 듯이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한 번만 봐달라고, 한 달만 지니면 수확을 할 텐데 봐주면 안 되느냐고 사정사정 하시던 아버지의 아픔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만일 지금 그를 만나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때 왜 그러셨어요? 꼭 그렇게 해야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