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06- 술과 그때 그 사람들
침팬지와 인간 아이의 문제해결 능력을 실험하면 오히려 침팬지가 인간 아이보다 낫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상자에 먹을 것을 넣어두고 꺼내어 먹게 하면 침팬지는 금세 요령껏 꺼내어 먹는다. 그런데 인간 아이는 어른들이 가르쳐준 대로 따라하느라 느리게 꺼낸다. 다만 침팬지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데 비해 인간은 학습 받은 대로 따라하면서 그것을 후대에 전달하는가 하면 새로운 방법들을 축적한다. 인간이 침팬지보다 나은 이유는 그 점이다. 학습한 것을 전달한다, 새로운 방법을 첨가한다는 점이다. 그 모두가 기억과 기록의 힘이다.
나는 기억한다. 모두를 기억하는 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내 기억에 남은 것을 기록한다. 누구나, 동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같은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일들일 수 있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그 누군가가 떠나면 사라지고 말 일들이기에 나는 기록한다. 나 개인의 삶은 그 시대의 풍속사이기도 하니까 나름 의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사라짐과 동시에 한 사람의 삶의 기억들 모두 사라지고 만다. 남길 수 있는 건 기록뿐이다. 때로 왜곡된 기억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 동네 가족동은 1반과 2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1반에 16호, 2반에 15호 합하여 31호가 거주했다. 적어도 우리 이사 온 후부터의 호구 변화는 생생하게 기억하건대 집집마다 많은 부침이 있었다. 한 가족이 와서 살다 간 집에 다른 가족이 들어와 살다가 가는 식으로 같은 집에 여러 가족이 나 살 던 동안에도 바뀐 집이 꽤 있었다. 폐가로 변한 집도 여러 집 있었다. 집은 사라지고 집터를 포함하여 농토로 변하면서 어떤 집은 영역을 늘려갔고 어떤 집은 집을 팔고 이사를 가면서 점차 가구 수도 줄어들었다.
부침이 많았던 동네, 동네사람들에 관한 기억이야 엄청 많지만 시시콜콜 모두 이야기할 건 아닌 것 같다. 이를 테면 기억 하나 하나 모두 글감이 되는 건 아니고 뭔가 특이한 일이라야 함을 느낀다. 단순한 그림 하나처럼 기억나는 게 아니라 특이하여 화젯거리가 될 법해야 조금은 길게 말할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사건 기억이다. 뭔가 다르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그때 그 사람들, 강하게 인상에 남은 이들, 술에 얽힌 일들이 인상에 남는다.
그때는 어른들이 술을 무척 즐겼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마실 수는 없었다. 일을 하다 새참으로 마시거나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서 마시는 정도였다. 평소에는 많이 마시지 않고 일하는데 힘이 안 들기 위해 마시는 정도였다. 주로 술에 절을 때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였다. 잔치집이거나 상가에서였다. 그런 날은 흔치 않았으나 생일 때가 또 있었다. 대략 마흔을 넘은 어른들 생일이면 생일잔치를 근사하게 벌였다. 생일을 맞은 어른은 동네잔치를 벌였다. 집에서 직접 막걸리를 빚었고 떡을 비롯한 여러 음식을 준비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그날은 잔치였다. 생일날이면 생일 집에 가면서 어른들은 생일선물로 대부분 소면국수 두 개 정도나 술 1리터 들이 큰 병 하나를 가져가곤 했다. 주로 경월소주였다. 생일날 아침에 간단하게 식사하고 술 한두 잔하고 곧바로 농삿일하러 가는 아저씨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진을 빼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주인이 일터로 나가고도 술에 취해 하루 종일 잠을 자다가 가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집에서 바라보면 맞은편, 신작로를 건너 산 밑에 정씨네가 살았다. 나와 같은 반 친구네 집이었다. 그 아저씨는 술버릇이 고약했다. 술 취해서 집에 돌아가면 막대기를 들고 설치면서 살림살이를 사정없이 부수었다. 항아리는 남아나지 않았다. 살림살이만 부수는 게 아니라 아주머니를 때리는 게 습관이었다. 그 고약한 술버릇에 이기지 못한 아주머니는 도망을 쳐 도회지에 나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 했다. 술버릇이 고쳐졌나 돌아오면 여전한 아저씨의 술버릇으로 아주머니는 금세 집을 나나곤 했다. 결국 그 집은 나와 그 친구가 4학년 때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말았다. 그 후 그 집은 터만 남았다.
술버릇이 고약한 아저씨는 또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나중에 유일하게 경운기를 가진 아저씨였다. 역시 나와 같은 반 여자 애 아버지였다. 술이 취해 집에 들어가면 도끼를 들고 설쳐서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일시적으로 술이 취한 상태를 피하면 되었으므로, 잠시 동안 모두 도망을 치면 아저씨는 도끼로 물건을 찍어대곤 했는데, 절대로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도끼 등으로 경운기 바퀴만 찍어댔기 때문에 손해는 보지 않았다. 다만 가족들을 공포분위기에 젖게 하는 것 빼고는 살림살이에 손해는 입히지 않았다. 그래선지 그 집은 늘 그 집에 살았다.
술을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이들이 있었다면 그렇지 않으면서 다른 집에 민폐를 끼치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중에 우리 옆집 최씨 아저씨가 있었다, 무척 술을 좋아하는 아저씨, 나와 동갑내기 친구네 아버지였다. 그 아저씨가 한 번은 아버지 생신에 왔다가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낮에 잠에서 깨어 술 한 잔 더하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술을 또 드렸다. 그리고는 모두 일터로 나갔는데 아저씨는 우리 안방에 오바이트를 하여 온통 갈대자리를 더럽혔다.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엄마한테 달려가 알렸다. 개를 불러들여 토사물을 먹게 했으나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엄마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옆집으로 달려가 그집 아주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우리 집으로 호출당한 착한 아주머니는 연신 미안하디시면서 여러 번 물을 떠다가 방을 청소해주고 아저씨를 끌고 돌아가셨다. 최씨 아저씨네는 내가 5학년 때 이사를 갔고 그 후엔 방씨네가 이사를 왔었고, 그 다음엔 서선생님 댁이 이사를 들어왔다.
조차떡이란 별명을 가진 동네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어느 집 생일에 가든 기본이 사흘을 머물렀다. 술에 취해 잠에 들었다가 일어나면 해장술 달라고 하여 또 마시고 잠들었다. 할머니와 나보다는 어린 손자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할머니가 데리러 온들 소용없었다. 그렇게 사흘을 버티고야 집으로 돌아가곤 하여 얻은 별명이 조차떡이었다. 성이 조씨인지라, 성격이 차져빠져서 얻은 별명이었다. 조차떡 할아버지도 내가 졸업하기 전 이사를 갔고 그 집엔 김씨네가 이사를 내려왔다.
그때 그 사람들, 술에 취하면 노래 삼아 우리 아버지를 가리켜 “불쌍한 우리 외삼촌”이라면서 구슬피 울던 고모사촌형, 그리 슬피 노래를 부르더니 오래 살지 못하고 여러 합병증으로 고모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렇고 저렇고 술에 취하면 평소와는 완전히 달라지던 어른들, 세월아 네월아 술에 취하면 모든 걸 잊은 듯 살던 어른들은 아주 멀리 시간여행을 떠난 지금, 이제는 그런 풍경들도 관습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자제할 줄 몰랐지만, 그렇기에 보다 인간적이었던 어른들, 막걸리를 닮을 사람들, 경월소주를 닮은 사람들, 그때 그 어른들이 그런 것 같다. 돌아보면 그래도 그때는 사람들이,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은 넉넉한 사람들이 살았노라고 기억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