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11- 시제를 지내는 행렬을 따라나서기
인간도 동물인 한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 일단 살아야 다음에 무엇이 있으니, 생존수단을 위한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시하지 못한다. 일단 모든 삶의 행동은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어느 정도 여유를 자져야 다음의 욕구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종족보존의 욕망을 가질 터이고, 그쯤 되면 다양한 욕망들이 분출될 수 있으니 잉여욕구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끝없는 욕망, 즉 잉여욕구를 갖는다. 그 잉여욕구 때문에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관계 속에서 울고 웃는다. 먹고 살기 힘겨운 삶을 이어야 할 시절이라면 잉여욕구는 거의 기억 속에 담기지 않는다. 대부분이 먹고 사는 문제를 기억한다.
내가 그러하다. 돌아보면 기억나느니 거의 먹고 사는 것과 관련한 기억들이 많다. 즐거운 일도 웃었을 일도 제법 많았을 테지만 내 기억엔 왠지 먹고 사는 일이 많다. 다른 기억들은 그 기억에 묻혀 맥을 못 쓰고 어디론가 사라져 재생이 어렵다. 그만큼 어린 날의 기억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말일 것이다.
그랬다. 창피스럽긴 했지만 배고픔을 해결하려면, 아니 평소엔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으려면 체면이니 창피함이니, 이것저것 따질 수 없었다. 그런 걸 무릅쓰고 찾아다녀야 했다. 작은형은 워낙 그런 걸 싫어해서 그런 자리에 잘 가지 않았지만, 어쩌다 내가 앞장서야 따라오긴 했지만, 나는 용기 내어 그런 자리에 앞장서곤 했다. 내가 좀 창피를 당하더라도 내가 나서면 누나랑 형제들이랑 별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기특하게도 나는 그때 했다.
나 살던 집에서 북동쪽으로 개울을 건너면 우리 동네에서 두 손가락에 꼽히는 부잣집 황씨네가 살았고, 바로 위로 올라가면 양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보다 2년 후배의 집이었다. 거기서 100여 미터 위쪽으로 후배의 친가인 옥이네 집, 동네 사람들 머리를 바리깡으로 깎아주는 민씨 아저씨네 집이었다.
옥이네 집은 산발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옥이네 집 뒤 산에 커다란 무덤이 있었다. 이 무덤은 우리 동네 사람의 무덤이 아니고 도관리에 산다는 모씨네 무덤이었다. 이 집은 부잣집이었나 싶었다. 해마다 시월이면 이 묘에서 시제를 지냈다. 시제는 조상을 가진 집에서 직접 차리는 일도 있었으나 대부분 시제는 종종 토지를 남에게 경작하도록 하는 대신 시제를 차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시제를 차려주는 입장에서는 토지 주의 시제를 잘 차려 주어야 다음 해에도 경작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토지 주는 때로 제수음식에 대해 불만을 해대는 경우도 꽤 있었다.
옥이네 윗 산 양지바른 묘에서 시제를 지내는 날이면 우렁골 쪽 고개를 넘어서 음식이랑 제구를 짊어진 어른들이 줄지어 왔다. 이 행렬은 우리 집을 지나서 황씨네 집쪽으로 개울을 건너서 가야 했다. 하여 날짜를 기억하지 못해도 그 무렵이면 시제를 빠뜨리지 않고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누구 집 시제인지는 몰라도 그날은 나도 무조건 행렬의 뒤를 따라 묘로 따라갔다. 즉은형은 가기 싫어했지만 마지못해 나를 따라나서곤 했다.
내가 이 행렬을 따라나선 이유는 있었다. 이 시제 집은 도관리 불당골에 사는 큰매형네와 어떤 관계가 있는 줄은 몰랐으나 큰매형이 항상 이 시제에 오셨다. 아주 꼼꼼하기로 소문난 매형은 동네에서 애경사가 있으면 그 집의 음식을 맡아 배분하는 과방 일을 맡곤 하셨는데, 이 시제에서도 매년 시제를 지내는 과정은 물론 시제를 마친 후에 음식을 다루는 역할, 과방을 맡았다. 매형이 속으로는 창피했을지 몰라도 나는 그것도 빽이라 생각하고 시제에 가곤 했다. 매형인 들 창피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았겠나. 시제를 마치고 나면 매형은 시제에 쓴 음식들, 떡이며 과자며 꽤 챙겨주셨다. 시제를 구경 온 아이들에게 몫몫이 나누어주셨지만, 나와 작은형에겐 특별히 슬쩍 더 챙겨주셨다. 그러시려니 남의 눈치도 보셔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눈치가 없었는지 그런 매형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할 줄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날은 운 좋은 날이었고,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색동저고리 색깔의 둥글고 큰 사탕이며, 쌀로 만든 무지개떡, 꽃문양이 찍힌 가래떡, 씹으면 쫄깃쫄깃하고 달달한 다이아몬드 모양의 약과, 말캉말캉하고 달콤한 다식, 꽤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과 과자를 맛볼 수 있었다. 매형 빽으로 제법 많은 음식을 가지고 돌아오면 누나랑 동생들이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뿌듯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기특했다. 어떤 별식이 생기면 나는 혼자 먹고 돌아오거나 하지 않았다. 꼭 집에 가지고 돌아와서 가족과 나누어 먹었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졌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때는 지금의 나보다 많이 이타적이었고 괜찮은 아이였다.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생존욕구, 먹고 사는 문제를 제일로 삼은 원초적인 동물이면서도, 나를 둘러싼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서 더한 기쁨을, 서로 나누는 기쁨을 알았던 어린 시절의 난 이미 잉여욕구의 맛을 아는 동물이었던 듯싶다. 기특했던 나, 그때의 나는 참 해맑은 소년이었을 텐데, 지금의 나, 거울에 비친 나는 왠지 삶에 찌들어 나이 들어가는 사나이 같아 왠지 낯설다. 다시 그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더 좋아하는 그 마음을 회복하면서 살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