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12- 이사 가던 날의 행렬

영광도서 0 552

<<靑山見我無語居 청산견아무어거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視吾無埃生 창공시오무애생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貪慾離脫怒抛棄 탐욕이탈노포기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水如風居歸天命 수여풍거귀천명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의 이 시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바로 집 앞 텃밭 300평 정도는 쓸 만했지만 나머지 밭은 경사가 심한데다 질펀해서 밭작물이 잘 안되었다. 그렇다고 논으로 바꾸려면 물을 댈 샘도 없었다. 집 한 채에 밭이 천여 평은 됨직한 집, 나 네 살 생일 날 이사 온 그 집은 28,000원에 구입했다고 했다. 그나마 그 집을 본거지 삼아 엄마와 아버지는 농번기엔 농사를 짓고, 겨울이면 오일장을 따라다니시면서 양미리 장사를 하셨고, 집에서 직접 옥수수엿을 고아서 내다 파시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으셨다.

 

그랬는데, 그나마 그 집도 31,000원에 팔아야만 했다. 할 수 없이 살 집을 구해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였다. 네 살 때 이사 와서 초등학교 졸업하기까지 살았던 집, 초가집이었다가 지붕개량사업으로 함석지붕으로 바뀐 집, 그 집이 팔렸다. 더는 우리 집이 아니었다. 새 봄이 오기 전에 비워줘야만 했다. 정확한 이유는 몰랐으나 당연히 그 집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었음은 분명했다. 새로운 집을 구할 수가 없었으니까.

 

비록 초라했다고 하더라도 그나마의 집도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기울만한 가세는 아니었으나 더 많이 기운 것은 분명했다. 갈 곳도 정하지 못한 채 어떻게 되겠지 하고 집은 팔았으나 식구도 많은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다. 결국 새로 살 처소를 마련한다고 한 것이 큰누나네 집이었다. 열여섯 살에 시집을 간 큰누나, 지독한, 아니 지긋지긋한 시집살이를 하는 큰누나임을 모른 것도 아니면서 나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큰누나네 소유의 집을 얻어 살아야 했다. 물론 큰누나네는 그 집에 살지는 않았다. 누나네는 그 집에 살다가 재산을 늘려 아랫마을로 이사를 했고, 그 집은 진즉에 다른 집에 도조를 받고 주었던 집이었다.

 

우리 살던 집에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집으로 백우산 중턱에 오솔길로 연결된 고개를 넘어가면 도관리 불당골이라고도 하고 우렁골이라고도 하는 곳이었다. 산을 깊이 푹 파고 든 곳에 딱 한 집 자리 잡은 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양자로 와서 살던 집이었고, 나 태어나기 전 6.25도 지낸 집이었다. 나는 살아본 적 없으나 작은누나까지 살았던 집이었으니, 엄마께서 열네 살에 시집을 오셔서 지독한 시어머니를 만나 시집살이를 하셨던 무척이나 애환이 쌓인 집이었다. 엄마가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산다는 심정이 어땠을지 나는 그때는 생각도 안 해 봤다.

 

공교롭게도 큰누나가 시집살이를 한 집이 그 집이었다. 엄마 못지않게 끔찍한 시집살이를 한 집이었다. 시어미니에게 온갖 모욕을 당해야 했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어린 것이 매를 맞으면서 시집살이를 해야 했던 큰누나, 멀지도 않고 마음만 먹으면, 아니 허락만 얻으면 언제든 쉽게 올 수 있는 친정이었지만 큰누나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집에 올 수 있었다. 한 번 오면 시집에 돌아가는 것을 지옥에 가는 것보다 싫어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니, 그때의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해 겨울,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 가는 날, 동네 어른들이 모두 모였다. 비록 멀리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행정구역상 광암리에서 도관리로 이사를 한다니 동네 어른들이 무척이나 섭섭해 했다. 동네 어른들 중 남자들은 모두 지게를 지고 와서 이삿짐을 지게로 날라주었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머리에 짐을 이고 날랐다. 우리가 살아갈 동네에서도 몇 분이 지원을 나왔다. 좁은 오솔길로 이삿짐을 이고 진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비록 가난했지만 인심만은 넉넉했던 동네어른들 덕분에 이사 가는 날은 쓸쓸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의 마음은 헤어리지 못했지만 내 어린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십 년 동안 살았던 집, 초가집의 기억이 함석지붕 기억보다 많았던 집의 기억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적당한 것일지, 주마등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달밤이면 초가지붕에 유난스럽게 하얗게 빛을 내는 듯 아름답게 지붕을 장식했던 하얀 박꽃들과 하얀 박들이며, 집안에서 깜박이던 아스라한 등잔불이며, 갖고 놀던 새가 죽자 뒷묵밭에 고이 묻어주던 일이며, 학교에서 받아오면서 귀퉁이만 손톱으로 뜯어먹으면서 돌아와서 누나랑 형이랑 동생들이랑 나누어먹던 노란 옥수수빵의 추억이며, 사랑방에 와서 살던 이웃들의 이야기며, 신비스럽던 중학생 누나를 놀리던 일이며, 수없이 많은 애환들이 내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집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다시는 들어가 살 수 없는 집이었다. 십 년 간의 시간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겐 무척 긴 시간으로 기억하는 집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이사 행렬을 따라 내 키에 맞는 지게에 짐을 짊어진 나도 행렬을 따랐다. 어른들은 으레 그렇듯이 모이면 재미있는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짐의 무게를 이이듯 즐거운 듯했지만, 내겐 슬픈 행렬이었다. 정든 집을 떠난다는 서글픔, 친구들과 자주 만날 수 없다는 슬픔, 내 놀이터가 바뀐다는 아쉬움이 내 마음을 편하게 두지 않았다. 새로 이사 가는 집은 그야말로 완전한 독립가옥으로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집이었으니까. 예감이 좋지 않은 이사, 이사 가던 날, 나는 많이 슬펐다. 이후 나는 많은 이사를 하면서 살았지만 그날처럼 슬픈 이삿날은 없었다.

 

돌아보면 나 네 살 때부터 열네 살까지 살았던 집, 그 집에서의 십 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많은 사연을 남긴 세월이었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내 인생의 절반의 기억을 차지한 집, 내 인생의 절반을 만들어준 세월이 아니었나 싶다. 남들이 보면 잘 울지 않지만 혼자 있을 때는 작은 일에도 툭하면 울기도 하는 내 여린 정서, 작은 일에도 잘 감동하는 소녀 같은 내 감성도 그 집에서 살아온 동안 형성된 게 아닌가 싶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숲으로 난 소로를 따라 이삿짐을 이고 진 어른들의 행렬이며, 그 뒤를 따라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가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던 제법 철이 일찍 든 나의 모습이 잔영으로 남는다. 그 나의 모습이 이제는 더는 내가 아닌 다른 촌스러운 소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더는 나는 그 소년, 감성이 풍부하여 잘 울어대던 그 소년은 나는 아니다. 순수한 그 소년도 아니다. 지금의 나는 나다. 그렇다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이삿짐을 다시 짊어지고 따라나서고도 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 오염이 심해 오욕으로 찌든 내 삶을 사랑하며 지금의 나를 진정한 나로 받아들이며 그냥저냥 살다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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