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13- 이사한 첫날 밤 부모님은?

영광도서 0 490

벌써 9월도 중순을 넘어선다. 코로나로 세상이 지옥 같지만 추석은 여지없이 다가온다. 추석이 다가오니 문득문득 부모님이 그립다. 이미 나도 딸들의 아버지다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럴 때면 나는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부모님이 그립다. 사람이 간사한지라 나 편할 때는 그런 생각이 나지 않다가 몸이라도 불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가 엄마요, 이어서 아버지이다. 나이 들어도 늙어도 한 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다.

 

나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 그리 멀리 이사를 온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낯설었다. 전에 살던 곳에선 그래도 여러 집을 내다볼 수 있었고, 신작로도 훤히 볼 수 있었지만 이사한 집에서는 아무런 집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산과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다. 집 앞 뒤로 작은 오솔길만 있는 그야말로 산속 마을이었다. 밭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으나 가물면 나오지 않아서 언덕을 넘어가서 개울에 가서 물을 파다 먹어야 하는, 전에 살던 집보다는 불편한 집이었다. 방도 크지 않은 딱 두 칸 밖에 없는 작은 집이었다.

 

산을 푹 파고 들어앉은 듯한 이 집, 집 앞 뒤로, 그리고 한쪽 옆으로 밭이 삼면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집 뒤로 백여 미터 올라가면 밭 끝자락이자 산발치에 양할아버지 무덤이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와 아버지껜 특별한 집이긴 했다. 아버지가 양자로 들어와서 사셨던 집이고, 열넷에 시집 온 엄마가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뎌낸 집이었다. 인생사새옹지마라고 부모님을 돌고 돌아 온 셈이었다. 처음엔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집이었으나 다시 돌아올 때는 사돈댁의 집에 신세지러 온 집이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래도 살만 큼 물려받은 재산을 순진한 아버지가 이웃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 전 재산을 탕진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고생고생하다 돌아왔으니, 아버지 마음은 어떠셨을까? 아버지가 그렇게 어리석게 처신하고 다닌다 해도 워낙 어린 나이여서 아버지가 어떤 처신을 하든 간섭할 수 없었던 엄마는 속을 많이 끓이셨다는데, 그 옛집에 돌아온 기분이 어떠셨을까?

 

얼마나 많은 영상이 엄마의 마음에 일어나기를 거듭했을까? 워낙 깊은 산골짜기라 일제 치하에선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았으나 “지독한 시어미니 밑에서 온갖 시집살이를 했다, 내가 시집살이 한 거를 소설로 써도 열 권은 나올 거다”시던 엄마, 그 끔찍한 영상들이 세월에 마모되어 그런 대로 씁쓸한 추억으로 남았을까? 아니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았을까? 그 시절이 지나고 아버지가 남은 재산을 하나 둘 탕진하면서 살림살이가 쪼그라들 때의 시절도, 6.25가 터지고 난리가 났을 때도 인민군 구경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이 남쪽으로 피란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피난처일 만큼 안전지대였던 집, 결국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 때엔 중공군이 우리 사는 집까지 들어와서 소를 잡아먹었다는, 그 일도 겪은 집, 뒷집 아저씨가 길 안내로 나섰다가 인민군 총에 맞아 피를 엄청 흘리는 걸 압지가 소쿠리에 담아 짊어지고 와서 살렸다는 끔찍한 기억이 남은 집, 시간의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집에 돌아온 아버지와 엄마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이전에 사셨을 때엔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사셨던 두 분이 다시 돌아왔을 때 달라진 것은 7남매의 부모셨다. 물론 큰형은 공부한답시고 서울로 떠나서 이사를 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큰누나는 시집을 갔으니, 남은 식구는 일곱 식구였다. 이전에 사셨을 땐 부모님 당신들의 집이었으나 돌아왔을 땐 사돈댁 소유의 집이었다. 지상에 방 한 칸도 없이 식구들만 많아졌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터였다.

 

아랫방과 윗방, 그리 크지 않은 방 두 칸, 그 안에 살림살이 쟁여 넣고 나니 일곱 식구가 빼곡하게 잠을 자야 했다. 이사 온 첫날 밤 부모님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초등학교 졸업한 해였으니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다. 이제야 지난날을 회상하려니 그때의 부모의 심정을 다소나마 헤아린다. 능력이 있든 없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으나 지상에 방 한 칸 내 방이라고 제대로 소유한 적 없으셨던 부모님, 물질적으로는 아무런 유산을 남겨주지 못하셨지만, 정직은 남겨주셨던 부모님, 지금은 나란히 공동묘지에 함께 누워계신다. 추석이 지나기 전에 뵈러 가야겠다. 엄마는 늘 나를 자랑스러워하셨으나 아버지는 내가 공장살이할 때 돌아가셨으니 내가 지상의 내 집이라고 소유한 걸 모르신다. 마음의 대화라도 나눠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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