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26- 다랑논두렁 풍경
갓난아이로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보살핌을 받아 자라 아이가 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노인이 되어 한평생을 살아가듯,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듯, 살아 있는 생물이나 사물이나 모든 것 역시 생장소멸의 과정을 겪는다. 어떤 것은 한철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일년일 수도 있고, 어떤 것은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일 수도 있다.
논두렁도 마찬가지이다. 봄 내내 여름 내내 분주하게 사람을 맞이하던 논두렁은 가을을 끝으로 동면에 들어간다. 그렇게 한살이를 마감하고 다음해에 다른 삶을 시작한다. 다랑 논의 한 살이는 특별하다. 평평한 지역에 논이 아니라 경사진 곳에 만든 논이라 이런 논두렁 관리를 제대로 안하면 농사를 짓는 중에 낭패를 본다. 한 바지가 150평에 배미 수로 10개는 족히 되니, 논두렁 수도 많다. 멀리서 보면 마치 계단식 같다. 어떤 논은 소를 메운 쟁기가 들어갈 수 없어 오롯이 괭이나 쇠스랑으로 파고 고르고 하여 모를 심기도 한다. 이런 논들을 다랑논이라고 부른다.
겨울이면 얼부풀기도 하고 여기저기 무너진 논두렁, 부지런히 벌써 삶을 시작한 땅강아지는 논두렁 여기저기를 굴로 뚫고 다닌다. 생쥐들 역시 여기 저기 굴을 뚫어 논두렁을 부실하게 만든다. 겨울이란 계절 역시 가만있지 않고 얼렸다가 녹였다가를 반복하는 바람에 얼부푼 논두렁은 논에 물을 대면 여기 저기 새게 만든다.
하여 봄이면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논을 갈아엎는다. 그 다음에 물을 댄다. 물은 이랑 사이를 채운다. 그렇게 채워진 물은 때로 논두렁을 뚫고 새어나간다. 때문에 그렇게 물을 채운 다음 가래질을 시작한다. 삽보다는 큰 가래, 삽 끝에 좌우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에 줄을 연결하여 두 사람이 앞에서 줄을 당기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삽을 대고 둘은 줄을 당겨서 가래질을 한다. 셋이 한 조를 이루어 가래로 논두렁 앞면을 40도 각도로 깎아 낸다. 그렇게 끝까지 한 두렁을 깎은 다음 되돌아서서 논바닥에 물을 먹은 흙을 깎인 두렁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삽을 든 한 사람이 뒤에서 삽으로 두렁을 두드리면서 곱게 새 옷을 입히듯 두렁을 만든다. 반들반들 윤을 내는 듯한 두렁, 멀리서 보면 윗부분이 맨들맨들 빛을 낸다.
이렇게 잘 다져진 논두렁은 논에 물을 대어도 새지 않는다. 가끔 땅강아지나 생쥐가 굴을 뚫렀는지를 살펴보면서 관리하면 무난히 여름을 넘길 수 있다. 장마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 물론 장마철에 워낙 비가 많이 와서 땅을 무르게 만들면 워낙 논두렁 높이가 2미터는 족히 넘기도 하니 터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럴 때면 논두렁 터진 흙이 논 전체를 덮기도 한다. 그럼에도 잘 견딘 논두렁 위로는 잘 자란 초록 물결이 계단처럼 넘실거린다. 넘실거리는 초록 물결을 바라보면 농부의 마음엔 뿌듯함이 일어난다.
가을에 접어들면 다랑논들 논두렁 너머로 잘 맺은 이삭들이 고개를 뻗치고 꽃을 피운다. 점차 알이 들면서 이삭들은 서서히 고개를 숙인다. 가끔 햇살을 제공하는 추석 즈음이면 잘 익은 이삭들이 논두렁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고 볏잎들 역시 황금색을 띄어 극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다랑논들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굴곡진 우리나라 지도처럼 생긴 황금빛들녘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다랑논들 두렁 위로 드러난 황금빛 벼들과 이삭이 넘실거린다. 아침이나 저녁나절 햇살 좋은 날엔 계단식처럼 논두렁 위로 일렁거리는 황금빛 벼들이 자아내는 풍경화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자랑한다.
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벼들, 농부들은 부지런히 수확을 시작한다. 왼손으로 한 손에 서너 폭 또는 대여섯 폭을 움켜쥐고 오른손에 쥔 낫으로 싹둑싹둑 잘라낸다. 잘라낸 벼들은 바닥에 얇게 펼쳐져 깔린다. 어느 정도 마르면 벼들을 거두어 단으로 묶는다. 볏짚은 자체가 부드럽기 때문에 한 폭 가량을 반으로 접어 그 자체로 단을 묶는다. 단에 묶인 볏단들은 두렁 위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인다. 그렇게 쌓아 놓으면 비가 온다 해도 겉에만 젖고 속은 젖지 않는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면 겉만 마르면 속도 자연히 마른다. 그렇게 바짝 마를 때까지 볏단들이 두렁을 차지한다. 다랑논들 두렁에 여기 저기 일정한 간격으로 쌓인 볏짚들의 피라미드를 끝으로 논두렁의 한 살이는 동면에 들어간다. 그루터기만 남은 논을 감싸 안은 논두렁들은 시들마른 풀들의 삭막한 모습을 보여주며 한 해가 저묾을 알려주며 새 옷을 입을 봄을 기다리며 동면을 시작한다. 생쥐들이 잠을 방해하며 여기 저기 굴을 뚫어댈 테지만.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인공물이든 자연물이든 생장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우리 사람 역시 마찬가지겠지. 논두렁이 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한 해를 여러 모양으로 살다 죽은 듯하다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듯 우리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먼 미래의 희망을 키운다. 올해의 삶은 완전히 죽은 듯하나 다음해에 다시 삶을 시작하는 논두렁처럼, 시들말라 완전히 죽은 식물들이 새로 싹을 내고 한 해를 다시 시작하듯, 나의 삶, 너의 삶, 우리 삶도 그러하겠지. 그렇게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