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27- 낟가리들의 가을풍경

영광도서 0 493

농부의 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아무리 서두른들 시간이 가지 않으면 수확을 얻을 수 없다. 봄에 씨를 뿌려 여름을 나고 가을이 되어야 결실을 얻는다. 그 동안 얼마나 고심이 많을까. 바람이 너무 불어도 곡식이 상할까, 비가 너무 와도 작황이 좋지 않을까, 너무 가물면 말라죽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날들의 연속을 감내해야 가을의 결실을 기대한다.

 

다른 계절보다도 가을은 무척이나 바빴다. 여름 내내 논이나 밭에 농약을 치거나 비료를 주거나 하는 일, 김을 매는 일로 바쁘기는 해도 가을보다는 나았다. 시급을 다투는 일은 여름엔 없었으나 가을엔 거의 동시에 추수를 해야 했다. 깨며, 콩이며, 팥이며 때를 놓치면 손해가 크기 때문이었다. 수일 사이에 해야 할 일들이 줄을 이었다.

 

깨는 완전히 익은 다음에 추수하려면 알이 와수수 쏟아지고 말기 때문에 조금 잎이 푸를 때 베어서 바닥에 깔아 그대로 말린다. 그렇게 며칠 두면 잘린 깨는 금방 푸른색을 지우고 검은 색으로 변한다. 잘 말랐다 싶으면 이슬이 내린 아침나절 마당으로 져 나른다. 깨는 빠짝 바르면 무척 겁기 때문에 지게에 산만큼 쌓아 올려 집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마당에 깔아 놓았다가 이슬이 마르면 굳이 도리깨가 아니어도 막대기 하나면 깨 타작을 하는 데 충분하다. 막대기로 툭툭 몇 번 치면 거의 알들이 쏙쏙 빠져나온다.

 

콩이나 팥 역시 너무 익으면 껍질이 벌어져서 알맹이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그 전에 미리 베어야 한다. 콩이나 팥을 수확하려면 미리 산에서 칡을 끊어 와야 한다. 단을 묶기 위해서다. 칡을 끊어다가 일정한 길이로 잘라서 굵은 칡은 다시 반 또는 반의반으로 갈라서 곡식 단을 묶기 좋게 잘라서 일정 양을 마련한다.

 

팥을 수확하려면 뿌리 채로 뽑는다. 뿌리 채로 뽑아서 손에 잡으면 손에 잡히는 뿌리 부분은 한두 주먹 정도 양이지만 앞쪽은 제법 풍성한 양이다. 뿌리 부분을 칡으로 묶는다. 그렇게 한 단 한 단 묶어낸 다음 지게로 져서 집 근처로 나른다. 그렇게 집 근처에는 풍성한 팥 단들이 수북하게 쌓인다.

 

콩은 낫으로 밑동을 꺾는다. 한 단이 대략 둘레로 5-6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로 팥 단과 달리 중간 부분을 묶는다. 그렇게 묶인 콩 단들을 모아 지게로 역시 집 근처로 모은다.

 

집 근처에는 이러한 콩이나 팥을 모아 쌓기 위한 낟가리를 만들기 위해 산에서 베어온 매출한 나무로 인디언들이 막사를 짓는 모양으로 기둥 대여섯 개를 세운다. 아래쪽은 넓게 자리 잡은 나무 기둥들, 높이가 대략 5-6미터는 족히 넘는 윗부분에선 기둥들이 한 곳에 모이도록 하되 서로 어긋나게 칡으로 묶어 고정시킨다. 그렇게 대략 세운 기둥들 중간 중간 칡으로 둘레를 따라 얽는다. 그러면 콩가리나 팥가리를 쌓기 위한 준비는 끝난다.

 

팥은 뿌리 부분을 가리에 고정 시킨다. 그렇게 한 단 한 단을 가리에 고정 시키며 쌓으면 안에는 텅 빈 공간이 생기고 밖에서 보면 안에 꽉 찬 낟가리가 된다. 이렇게 가리로 만들어 건조한다. 안에는 비어 있기 때문에 통풍이 잘 되어 팥이 잘 마른다.

 

콩은 팥 가리와는 다르게 쌓을 수밖에 없다. 밑 부분을 밖을 향하게 하여 차곡차곡 쌓는다. 그렇게 한 가리를 쌓으면 아랫부분은 넓고 윗부분은 뾰족한 콩가리가 완성된다. 역시 안은 비어 있어서 때로는 아이들이 콩단 두어 단을 빼고 안에 들어가 숨기도 한다.

 

이렇게 사방 밭에서 모아온 콩이나 팥 가리들이 가을이면 집 주변에 우뚝우뚝 선다. 한 해를 결산하는 시간, 집 주변에 얼마나 많은 옥수수 우리 또는 옥수수 가리, 콩 가리, 팥 가리, 조 가리, 다양한 곡식들, 타작을 기다리는 가리들이 양지바른 마당 근처 밭에 얼마나 많으냐가 그 집의 수확의 전체를 가늠하게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농부들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핀다.

 

지금은 농촌에 가도 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수수깡으로 엮은 옥수수 우리, 그 안에 가득 찬 하얀 또는 노란 옥수수이삭들의 모습, 옥수수를 완전히 까지 않고 껍질들을 살려 처마 밑에 매든 튼실한 옥수수 이삭들, 타작을 기다라며 인디언 막사들보다 높이 솟은 삼각뿔 모양의 콩이나 팥을 쌓아 올려 만든 낟가리들, 기억에만 남은 모습들이다. 시대가 변하니 사라지는 것들도 많다. 사라지는 모든 풍경들은 그립다. 다시 볼 수 없어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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