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29- 빚을 지고 싶어도 빚을 질 수 없었던 날들

영광도서 0 470

가끔 농가부채 탕감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온당할까를 생각한다. 그것이 공평할지, 어떤 사람은 억울해할지, 그걸 생각한다. 편견일지 몰라도 내가 농촌에 살 때 얻은 경험 때문이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 많이 공정해졌겠지 하면서도 기우는 여전히 남는다. 평등이니 공정이니 정의니 하는 게 말로는 쉬운데 실상 현실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끼리의 공정, 우리끼리의 평등, 우리끼리의 정의라면 그건 온당하지 않으니까.

 

지금과 달리 이전 농촌엔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돈이 아주 귀했다. 그럼에도 봄이면 목돈이 필요했다. 일단 농사를 지으려면 비료와 농약을 반드시 구입해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걸 구입할 돈이 없으면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소위 부잣집에서 곡식을 빌리거나 곡식 값에 해당하는 돈을 빌려야 했다. 예를 들어 콩 한 가마니를 빌리거나 콩 한 가마니 값을 빌리면 가을에 콩 한 가마니 반을 갚아야 했다. 개월 수로 따지면 반 년 정도인데 그만큼을 갚아야 했으니 고리대금에 버금갔다.

 

때문에 봄이면 농협조합에서 외상으로 제공하는 농약과 비료를 최대한 타내는 게 최상이었다. 이자도 거의 없이 갚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집마다 최대한 외상비료를, 외상농약을 받으려 했다. 외상은 각 개인이 신청해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반장이 그걸 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공하는 양은 턱없이 부족했으니 서로 많이 받으려 최대한 신청을 했다. 반장과 몇몇 마을 유지들이 그걸 배당했는데, 늘 거의 관습적으로 가난한 집들은 최소한을 배당받았고, 유지들이나 돈푼깨나 있는 집들은 오히려 많은 양을 배당받았다. 비료 구입의 어려움은 가난할수록 더한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그렇게 외상비료와 농약 배당을 하고 나면 반장과 유지들 몇몇이 대표로 면소재지에 있는 농협에 나가서 비료를 타왔다. 그 날은 트럭을 대절하여 동네에서 배당 받은 비료를 싣고 왔다. 마을 중간 쯤 막거리에 비료를 부려 놓으면 각자 그곳에 가서 배당받은 비료를 타서 짊어지고 오면 되었다. 우리를 비롯한 가난한 집들은 그걸로 턱 없이 부족했다. 때문에 이웃에 사체를 얻어 비료를 추가로 구입해야 했다.

 

경제적인 부담도 부담이지만 따로 개인적으로 구입하려면 트럭을 대절할 형편이 못 되니 면소재지에서 까마득한 가족고개를 넘어 오는 그 길을 지게로 지고 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 25킬로그램 비료를 세 포대 짊어지면 그런 대로 갈만 하지만 평지를 제외하고 깔딱고개 같은 길 3-4킬로미터를 짊어지고 넘어오려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오르막에서 쉬면 일어날 때 더 힘들기 때문에 극한 인내심으로 참고 참아 오르막 정점에 이르러서야 쉬곤 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 작은형, 나 셋 모두 지게를 짊어지고 그 길을 나서서 오가야 했다. 가난은 그렇게 서럽고 힘겨웠다.

 

저리의 영농자금이 나와도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었고, 다시 말하면 빚을 지고 싶어도 빚을 질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정부에서 주는 외상농약이니 외상비료도 소위 있는 사람들의 차지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농협의 부채는 있는 사람들, 소위 목소리 큰 마을 유지들이 질 수밖에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사채는 있어도 정부 부채는 없었다. 모순이었다. 정작 돈이 필요한 이들에겐 정부는 외면했고, 오히려 돈이 있는 이들은 그런 자금을 저리로 받아 다른 데 이용했다. 사채를 얻다 보니 고리로 갚아야 하는 악순환, 가난한 이들은 점점 더 쪼들렸고, 부자들은 고리를 받아 점점 더 돈을 모았다.

 

그때 기준, 그때 경험이라면, 그것이 지금도 같은 상황이라면 농가부채 탕감에 가장 억울해 할 사람들은 빚 없는, 빚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힘겨웠던 날의 그런 모순들, 그때는 세상은 그런 거려니, 그렇게 돌아가는 이치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우린,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소외당하고 살았음을 이제야 안다.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으니 보다 공정하고, 보다 평등하고 보다 정의로워졌기를, 나의 경험의 잣대는 이제는 편견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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