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7- 낯선 서울 풍경들!
낯설다. 불과 엊그제의 삶과 오늘의 삶이 확연히 다를 때 느끼는 감정, 누군가에겐 설렘이겠지만 누군가에겐 두려움이기도 할 낯선 아침,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 또는 그 이상을 겪을 것이다. 희망일 수도 있고 암울한 앞날일 수도 있을 순간, 한 마디로 낯설다.
서울에서 처음 밤을 보낸 나의 감정이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다섯 시에 장의자에서 일어났다. 매일이 나의 침대는 이 장의자일 터였다. 잠버릇이 고약한 나는 꼼짝하지 않고 얌전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작한 일은 간밤에 이미 청소를 끝냈으나 다시 한 번 전 교실을 둘러보았다. 미진한 곳을 청소하고 다음 할 일은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1층에 내려가 셔터를 여는 일이었다. 새벽반 학생들 수업은 여섯시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전날 저녁에 교육을 받은 대로 쇠꼬챙이를 꽂아 신나게 돌려야 했다. 끼익 소리를 내며 돌릴 때마다 조금씩 올라가는 셔터, 빼꼼이 열려 들어올 틈이 마련되자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로 서라벌고등학교 학생들과 동구여상학생들이었다.
그렇게 셔터 문을 열어놓고 교실 한 번 점검한 후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오면 아침을 먹으러 학원을 나섰다. 남들은 아침을 먹고 회사로 출근하는데 나는 아침을 먹으러 집으로 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하루 세 번은 식사시간이자 자유 시간이었다. 학원을 나서 다리를 건너면 직진방향에 극장이 하나 있었는데, 미도극장이었는지 대지극장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만, 극장 쪽으로 가지 않고 다리를 건너 좌회전하면 정릉천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걸으면 정릉2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1킬로미터 남짓 걸으면 그쯤에서 정릉천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와 거기서 갈라져 마을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길로 갈라졌다. 그곳엔 오랜 역사를 가진 정릉제일감리교회가 있었다.
거기서 마을 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왼쪽에 단독주택, 미음자 형의 마당이 있는 집, 탈렌트 K의 집이자 큰형이 세들어 사는 집이 있었다. 매일 그 집에 세 번 밥 때면 드나들었다. 그날부터 비록 하루 세 번밖에 만나지 않지만 주인 할머니는 붙임성이 좋으셔서 내가 드나들 때마다 반겨주셨다. 또한 탈렌트 누나와 내 사이즈가 비슷한 걸 아시곤 그 누나가 입던 옷들을 자주 챙겨주셨다.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고급브랜드의 남방을 꽤 여러 개 챙겨주셨다.
그 길을 오가며 색다른 풍경 하나는 거지들이었다. 정릉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몇 있었는데 다리 밑에는 피부가 검게 그을린 내 또래의 거지들, 반바지만 입은 거지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진정한 거지들로 돈을 구걸하지 않았다. 식사 때면 집집마다 다니면서 음식을 구걸했다. 비닐봉지나 조금 넓은 깡통이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도구였다.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비닐봉지를 보면 그 안엔 밤이며 반찬이며 뒤섞인 음식물이 들어 있었다. 한 집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여러 집에서 주는 대로 모아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은 음식을 그들은 다리 아래서 끓여서 나누어 먹거나 그냥 먹거나 하였다. 그들은 진정한 거지들이었다.
그런 풍경이 내겐 무척 낯설었다. 시골엔 거지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오가면서 느낀 이상한 점이랄까 이해되지 않는 점이 또 있었다. 어디에도 밭도 없고 논도 없는데, 온통 건물들이거나 집들뿐인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지 참 궁금했다. 이 속에서 나는 이제 지내야 했다. 혹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하는 기대로 서울에서의 날들을, 밤이면 엄마 생각, 아버지 생각으로 잠을 설치면서 썩 내키지 않는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어렸을, 아니면 철이 거의 들지 않았을 청소년기에 닥친 낯선 일들이라 그런지 그날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정릉천을 따라 걸으며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던 모습들도 생생하다. 추억으로 남긴 했으나 두려움이 먼저 엄습했던 그 날들, 살아 있는 동안은 잊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