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40- 한얼산기도원에서 보낸 날들

영광도서 0 1,079

사랑하는 자식을 보내는 듯 따뜻한 시선으로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시던 목사님 내외분의 사랑 어린 모습을 뒤로하고 뜨거운 여름길을 다시 걸었다. 기도 받으러 갈 때엔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를 읊조리면 걸었다면, 교회를 나서 돌아 나오는 길엔 찬송가를 부르며 신작로를 걸었다.

 

읍내로 가는 큰길가에서 완행버스를 기다려 읍내 버스터널에서 내려서 춘천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한얼산기도원에 가기 위해서였다. 춘천행 버스는 구불구불한 원창고갯길을 올라 다시 급경사를 따라 춘천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는 햇살이 쨍쨍 내리쬐었는데, 원창고개를 넘으면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마치 지난한 삶을 예고하듯 기분도 우중충했다. 세상이 나를 저주하는 듯한 기분, 춘천에서 다시 완행버스를 갈아타고 한얼산 기도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처량하달까 궁상맞달까, 추적ㅊ적 내리는 비를 그냥 맞으며 한얼산기도원으로 가는 길을 다라 올라갔다. 경춘가도에서 기도원까지는 2킬로미터 가량 되지 싶었다. 몸이 멀쩡하면 이런 비를 맞으며 걷노라면 낭만적이다 싶겠는데, 몸이 좋지 않으니 차량하기 그지없었다. 비를 맞긴 했지만 세찬 비는 아니었기에 그런 대로 맞을 만했다. 기도원에 도착하여 접수를 하고 방을 배정받았다. 다섯이 한 방을 배정 받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한 방을 쓰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사정을 안고 왔을 사람들, 모두 좋은 이들이었다. 위로의 말들과 환영을 받으며 그 저녁엔 누군가 밥을 해서 나누어 먹었다. 어떻게 저녁을 해결하려나 걱정이었는데 그렇게 저녁을 해결했다.

 

다음날부터는 아치 저녁으로 집화가 열렸다. 비가 오지 않으면 잣나무 숲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천석 목사님이 집회를 할 때면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나처럼 몸이 아파서 기도로 고치려고 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그냥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거나 심기일전 믿음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방언의 능력을 받으려고 온 이들이 특히 많았는데, 영어를 전혀 모랐던 이들이 갑자기 방언이 터져 영어로 기도하는 걸 보면 신비스러웠다. 어떤 이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받아 방언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런 은사를 받을까 두려워한 탓에 방언을 받지 못했다.

 

집회가 끝날 무렵이면 이천석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앞쪽으로 물려갔다. 소극적인 성격의 나는 뒤로 줄을 섰다가 포기하고 돌아섰다. 기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고 많았다. 그러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집회가 끝나면 잣나무 숲 여기저기에서 각자 기도를 드렸다. 캄캄한 잣나무 숲에서 각자의 문제를 갖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나 역시 간절함으로 기도를 드렸다. 순수했다면 순수한 믿음이었다. 각자 기도를 마치면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다서이 한 방에서 복작대야 했지만 서로를 위하는 배려로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남들은 잠들어도 잠이 오지 않으면 한쪽 구석에서서 기도를 드렸다. 몸 건강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님이 고쳐주셨나 싶어서 시험을 해 보았다. 숨을 길게 내 쉬었다. 여전히 오른쪽 옆구리가 당겼다. 기도 응답을 못 받은 것이었다.

 

새로운 아침을 맞았지만 희망은 여전히 멀었다. 하루 지났으니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낯선 기도원에서의 하루를 무사히 넘겼음에 만족했다. 다시 기도를 하면 될 테니까 싶었다. 다시 하루의 시작이었다. 잣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기도원엔 모기도 없었고 개미도 없어서 좋았다. 하루 종일 틈틈이 조용한 곳을 찾아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일상의 시작, 마음은 편안했다. 기어이 몸의 치유를 얻으리라 믿었다. 물론 가끔 울컥하니 감정이 솟구치면서 하루 빨리 엄마랑 아버지랑 보고 싶긴 했지만.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성경구절을 있는 그대로 믿으면 되련만 믿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에서 적잖이 의심이 함께 올라오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 믿음으로 희망을 발견하면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밤이 오면 앤지 모를 두려움과 외로움에 사로잡힌 젊은 내가 있었다. 그 밤들, 간절함의 마음들, 그날들의 나는 순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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