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49- 마지막 펜팔과 절교
어떤 우연은 다른 우연을 낳는다. 사로 다른 우연이지만 어딘지 본질이 같은 우연은 서로 합쳐져서 도 다른 우연을 낳는다. 그런 면에서 우연은 없다. 다시 곰곰이 생각하면 우연은 없고 필연들이다. 물론 우연이 우연을 낳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우연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건 우연이다. 삶에는 우연과 필연이 공존한다. 선과 악이 공존하듯, 추와 미가 공존하듯, 세상은 대칭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겠다.
나에게 글쓰기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필연이었다. 내가 글쓰기 능력을 갖고 태어난 건 아니었다. 우연이 동시 한 편 쓴 거였다.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농사를 짓다 보니 친구들이 없어 외로웠다. 펜팔을 했다. 돌아보니 초등학교 때 글짓기를 배우지 않았다면 엽서를 쓰고 펜팔을 하지 않았을 테니, 초등학교 때 사건이 낳아준 우연이 나에게 찾아온 거였다. 펜팔은 글쓰기의 연습이었다.
여자의 마음이 되어 남자들과의 펜팔, 여자인 척 글씨도 여성체로 썼다. 내용도 정말 여자처럼 부드러웠다. 그렇게 여자로 집중해서 쓰니까 정말로 내가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재미가 있었다. 수많은 남자들 중 내가 고른 다섯 명과의 펜팔, 한 장 한 장 쓰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반신용 우표를 보내지 않은 남자들이 생겼다. 상대를 즐겁게 하는 셈인 나, 봉사를 하는 셈이라고 생각한 나는 손해를 볼 수는 없었다. 하여 그런 친구들에겐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미숙’에게 반했는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왔다. 끈질기게 편지를 해대는 남자들도 있었다.
여전히 우표를 보낸 남자, 글씨도 잘 쓰고, 내용도 그럴 듯하고, 같은 굽 내에 사는 남자와 만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내게 맞추려 무척 애를 썼다.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었기에 우표수집이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사용하기 전 우표나 사용한 우표, 국내에서 발행한 우표나 외국에서 발행한 우표 등이 꽤 않이 들어 있었다. 독서를 좋아한다니 책도 보내왔다. 내 쪽에선 사기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봉사이기도 한 일이었으나 충분한 대가를 받는 기분이었다. 상대방은 분명 여자로 생각하고 편지를 받으면 무척 즐거웠을 것이지만 나는 편지 내용이 즐겁지는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속인다는 게 재미있었다. 잘도 속는다, 나를 제법 잘 속인다, 그게 즐거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편지를 주고받은 지 8개월이 지나자 그 친구가 사진을 보내왔다. 잘생겼다. 그러나 나에겐 관심이 없음은 당연했다. 받자마자 버렸다. 대신 내 사진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내 사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우리 집안엔 여자들도 없었다. 아들만 많은 집안인지라, 내 동생 친구의 조카 사진을 구해서 보냈다. 사진을 보냈는데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저렇게 핑계로 넘기긴 했는데 3개월이 지나자 무조건 만나러 오겠단다. 그 친구가 우리 동네에 오려면 그 친구 집에서 버스로 40분 읍내로 나와서 읍내에서 80리를 버스로 갈아타고 면소재지에서 내려야 했다.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면소재지에서 걸어서 까마득한 고갯길, 8킬로미터의 신작로를 걸어 고개를 넘어와야 했다. 그렇게 무조건 왔는데 상대가 남자인 걸 안다면, 그 생각을 하니 무척 겁이 났다. 부랴부랴 답장을 썼다. 내가 갑자기 서울에 취직이 되어 서울로 간다, 가서 편지 보낼 테니 그때까지 참아달라고. 그렇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는데 그로부터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아 살아남았다.
여자가 되어 남자에게 편지 쓰기, 그때 거짓말하는 연습, 상상으로 글쓰는 연습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때 그런 장남들이 나중에 나를 작가 되게 했다 생각하면 그 모든 일들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내게 희생당한 그 친구에겐 우롱이자 사기였으니 알았으면 무척이나 화를 냈을 터이지만 전혀 몰랐으니 그에겐 아름다운 추억이었을 테고, 어쩌면 그 소녀의 사진을 몰래 감춰두고 그 옛날을 추억한다면 그에겐 여전히 기쁨이리라. 그 생각으로 내 잘못을 정당화하련다. 나는 그걸로 작가의 길을 닦았고 그는 아름다운 추억 하나 간직하고 있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