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제814회 - " 어린왕자 : 인간의 사막에서 선택은 삶의 성패를 좌우한다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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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1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사막에서는 길이 없습니다. 온통 모래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냥 구조대를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생텍쥐페리와 기관사 프레보는 어디로 갈지 방향을 정합니다. 아마도 비행한 시간을 계산하면 나일강은 넘어온 것 같습니다. 서쪽으로 가는 것이 타당할 것 같은데 영 기분이 안 내킵니다. 북으로 가려니 바다로 향하는 길 같지만 일단 다음으로 미룹니다. 어디로, 어느 쪽으로 갈까요? 목표로 삼을 만한 그 무엇도 없는 열사의 사막, 도대체 어떤 것을 지표로 삼아 걸어가야 할까요?
어느 쪽으로 가든 희망은 제로라면, 그저 손바닥에 침을 튀겨서 침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이들은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아봅니다. 희망은 없어도 살아 있으니 움직여 봐야 하니까요. 동북쪽, 그의 동료 기요메가 안데스 산맥에서 좌초되었을 때 걸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던 그 방향이니까 무의식이 통했나 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좌표를 잡을 것도 없고, 표식을 남길 만한 그 무엇이 없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아시스를 찾든 사람을 찾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해서 이들은 모래 위에 긴 줄을 남기며 전진합니다. 돌아올 길을 표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꼬박 다섯 시간을 걸었지만 여전히 모래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잊고 있었습니다. 문득 돌아갈 길을 위해 표시를 남기는 일을 잊고 한참을 그렇게 걷기만 했던 겁니다. 그 흔적마저 찾지 못하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끊겼던 표시를 다시 찾아 잇고 나서 또 다시 앞으로 걸어봅니다. 더위가 밀려옵니다. 그 더위가 정신을 흐트러뜨리며 신기루를 데리고 나타납니다. 큰 호수가 보여 다가가면 이내 호수는커녕 모래밖에 없습니다. 눈에 닿은 것이라곤 모래로 이루어진 지평선뿐입니다.
족히 35키로미터쯤 걸었을까, 아하 보입니다. 요새가 보이고, 이슬람교 교당의 첨탑이 보이고, 나란히 늘어선 교당의 부속건물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잠시, 그것들은 단순히 빛의 굴절로 이루어진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희망이 있어서 걸은 건 아니지만 이제 다시 비행기가 난파된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돌아가야 그나마 남겨놓은 몇방울의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평선 너머로 또 보입니다. 신기루, 아니 진짜 도시, 어쩌면 달콤한 물일지도 모릅니다. 그 안타까운 꿈을 버리고 비행기가 누워 있는 곳으로 그들은 돌아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갔습니다. 아무 보람도 없는 하루, 대신 물방울이 하나도 없이 사라진 하루를 그렇게 보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헛것, 그것은 신기루,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엔 분명 존재하는 오아시스,
때로 아름다운 유혹은 우리를 사막과 같은 인생에서 우리를 회복불능 상태에 빠지게도 합니다. 반면 끈질기게 찾아내는 우리의 꿈 오아시스는 순간은 어려워도 긴 행복의 순간들을 가져다 줍니다.
-어린왕자의 사람을 사랑하는 법- 따라서 선택은 아주 중요합니다.
때로 우리 삶도 아무런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오리무중일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도 잡을 수 없고, 꼬이고 꼬인 문제를 아무리 풀려고 해도 얽히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우리 인생의 사막입니다. 그렇게 희망이란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 있는 존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 점이 다른 짐승과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때로는 운에 맡기고 문제에 뛰어들어 깨져보기도 하고, 그 문제에 운을 걸어보는 것이 그대로 주저앉아 절망과 악수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삶의 선택, 선택하는 일은 갈등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그 선택의 가치가 등가치할수록 선택은 더 어렵습니다. 여러 선택 중 하나만 월등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당연히 갈등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막엔 희망이란 없습니다. 어쩌면 선택이 쉬울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결과는 운에 달려 있으니까요.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매순간 선택을 강요 받고 있습니다. 시간으로 부터 삶의 조건으로 부터 말입니다.
오늘 아침엔 선택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희망이라곤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살다보면 그런 날 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절망에서 벗어난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며 그 방법을 답습합니다. 지금, 지금입니다. 희망이란 없는 그날을 피해가려면, 아무런 좌표로 세울 것도 없는 상황을 오지 않게 하려면 지금 당장 온당한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모래시계에서 빠져나오는 모래처럼 아주 천천히 이미 미래를 선택하며,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작은 발자국들이 나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으로 이 아침에 선택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느 쪽으로 가든 희망은 제로라면, 그저 손바닥에 침을 튀겨서 침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이들은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아봅니다. 희망은 없어도 살아 있으니 움직여 봐야 하니까요. 동북쪽, 그의 동료 기요메가 안데스 산맥에서 좌초되었을 때 걸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던 그 방향이니까 무의식이 통했나 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좌표를 잡을 것도 없고, 표식을 남길 만한 그 무엇이 없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아시스를 찾든 사람을 찾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해서 이들은 모래 위에 긴 줄을 남기며 전진합니다. 돌아올 길을 표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꼬박 다섯 시간을 걸었지만 여전히 모래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잊고 있었습니다. 문득 돌아갈 길을 위해 표시를 남기는 일을 잊고 한참을 그렇게 걷기만 했던 겁니다. 그 흔적마저 찾지 못하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끊겼던 표시를 다시 찾아 잇고 나서 또 다시 앞으로 걸어봅니다. 더위가 밀려옵니다. 그 더위가 정신을 흐트러뜨리며 신기루를 데리고 나타납니다. 큰 호수가 보여 다가가면 이내 호수는커녕 모래밖에 없습니다. 눈에 닿은 것이라곤 모래로 이루어진 지평선뿐입니다.
족히 35키로미터쯤 걸었을까, 아하 보입니다. 요새가 보이고, 이슬람교 교당의 첨탑이 보이고, 나란히 늘어선 교당의 부속건물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잠시, 그것들은 단순히 빛의 굴절로 이루어진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희망이 있어서 걸은 건 아니지만 이제 다시 비행기가 난파된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돌아가야 그나마 남겨놓은 몇방울의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평선 너머로 또 보입니다. 신기루, 아니 진짜 도시, 어쩌면 달콤한 물일지도 모릅니다. 그 안타까운 꿈을 버리고 비행기가 누워 있는 곳으로 그들은 돌아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갔습니다. 아무 보람도 없는 하루, 대신 물방울이 하나도 없이 사라진 하루를 그렇게 보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헛것, 그것은 신기루,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엔 분명 존재하는 오아시스,
때로 아름다운 유혹은 우리를 사막과 같은 인생에서 우리를 회복불능 상태에 빠지게도 합니다. 반면 끈질기게 찾아내는 우리의 꿈 오아시스는 순간은 어려워도 긴 행복의 순간들을 가져다 줍니다.
-어린왕자의 사람을 사랑하는 법- 따라서 선택은 아주 중요합니다.
때로 우리 삶도 아무런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오리무중일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도 잡을 수 없고, 꼬이고 꼬인 문제를 아무리 풀려고 해도 얽히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우리 인생의 사막입니다. 그렇게 희망이란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 있는 존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 점이 다른 짐승과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때로는 운에 맡기고 문제에 뛰어들어 깨져보기도 하고, 그 문제에 운을 걸어보는 것이 그대로 주저앉아 절망과 악수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삶의 선택, 선택하는 일은 갈등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그 선택의 가치가 등가치할수록 선택은 더 어렵습니다. 여러 선택 중 하나만 월등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당연히 갈등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막엔 희망이란 없습니다. 어쩌면 선택이 쉬울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결과는 운에 달려 있으니까요.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든 매순간 선택을 강요 받고 있습니다. 시간으로 부터 삶의 조건으로 부터 말입니다.
오늘 아침엔 선택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희망이라곤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살다보면 그런 날 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절망에서 벗어난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며 그 방법을 답습합니다. 지금, 지금입니다. 희망이란 없는 그날을 피해가려면, 아무런 좌표로 세울 것도 없는 상황을 오지 않게 하려면 지금 당장 온당한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모래시계에서 빠져나오는 모래처럼 아주 천천히 이미 미래를 선택하며,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작은 발자국들이 나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으로 이 아침에 선택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