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제835회 - " 사람의 숨결이 있는 자연의 공간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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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1
자연스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공적인 것에 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저 자연 그대로란 말입니다. 구부러지면 구부러지는 대로, 멈추면 멈춘 채로, 흐르면 흐르는 대로, 곱든 추하든, 곧바르든 구부러졌든, 각이든 선이든, 다듬지 않은 그대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자연적인 것이 더 개성이 있을까요? 아니면 인공적인 더 개성적일까요? 물질문명이 발전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개성을 찾습니다. 남다른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개성은 없어지고 그저 획일화되어 갑니다.
모든 것들이 규격화되고, 단일화됩니다. 개성을 찾으나 개성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점차 빠른 것을 원하고 편리한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어떤 틀을 만들고 모든 것을 그 틀에 맞추는 겁니다. 당연히 개성을 원하나 유행을 따르고, 획일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건도 공장에서 같은 것들을 찍어냅니다. 집도 똑같은 구조로 대대적으로 짓습니다. 그러한 공간, 그러한 물건들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거의 엇비슷하게 변합니다. 그들은 생각도 닮아가고 행동도 닮아갑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사람들처럼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생각을 칩에 담아 입력 당한 로봇처럼 같은 생각을 하며 삽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어떤 장소에서 생활하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마음가짐도 행동도 그에 따릅니다. 현대인은 모두 인공적입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기계적으로 생각합니다. 자연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인 존재로 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심이 각박해지고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기계처럼 변하는 겁니다. 자연스러운 감정 대신에 인공적인 이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따뜻한 마음 대신에 사무적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이렇게 껍질은 사람이나 속은 로봇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변하면서도 그 변화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두고 살아가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모모가 생할하는 원형극장은 구조도 생김새도 재료도 자연적인 것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습니다. 커다른 돌로만 지어졌습니다. 관객이 앉는 좌석은 깔때기처럼 겹겹이 계단식입니다. 건물도 획일적이 아니라 원 모양, 갸름한 타원형, 커다란 반원 모양 등 다양합니다. 축구장만큼 큰 것, 자그마한 극장이 있습니다. 장식이 화려한 극장이 있는가 하면 아무 장식도 없는 극장도 있습니다. 이들 극장의 공통점이라면 지붕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늘이 모두 트여 있습니다. 따라서 해가 쨍쨍한 날엔 햇살을 그대로 받고 비가 내리는 날엔 고스란히 그 비를 맞아야 합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런 극장을 갖고 싶어 했답니다.
"그들은, 무대에서 그려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나 우스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면, 무대에서 벌어지는 삶이 자신들의 일상의 삶보다 더 현실 같다는 묘한 느낌을 갖곤 했다. 그들은 이러한 또 다른 현실에 귀기울이기를 좋아했다."
극장의 시대 거기엔 우리 삶을 재현한 연극이 상연되었습니다. 그들에게선 실제로 땀냄새가 났으며, 거친 숨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습니다. 반면 현대는 그런 연극보다는 영화의 시대입니다. 획일화 대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모의 공간은 자연스러운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인간 본래의 생각이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입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 만큼이나 각기 독특한 삶의 모습들이, 울퉁불퉁하면서도 다소곳하게 숨 쉬던 공간입니다. 거기엔 자연이 그대로 스며들어 오고, 자연의 혜택이 그대로 주어지기도 하고, 자연의 심술이 그대로 헤집고 들어오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삶들, 들쭉날쯕한 삶들, 오밀조밀한 삶들이 자연을 닮은 채로 숨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그런 삶의 모습, 못생긴 삶의 모습들이 그립습니다. 잘생긴, 획일화된 삶의 모습들, 공장제품 같은 개성 없는 삶의 모습들 속에 섞여 살면서 우리는 가끔 폐쇄된 공간에 사는 듯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자연스러움에서 가급적 멀리 가려합니다. 그것이 더 편리하고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 뒤쳐져서 생존마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숨결이, 자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공간이 그립습니다. 획일화를 추진하면서도 개성을 찾는 이 모순 앞에서 가끔 자연을 그리워하고 자연을 찾아 그 자연의 품 속에 들어가기라도 해야겠지요. 우리는 그래도 사람이고 싶으니까요. 오늘은 잠시라도 푸른 가을 하늘을 올려다봐야하겠습니다.
모든 것들이 규격화되고, 단일화됩니다. 개성을 찾으나 개성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점차 빠른 것을 원하고 편리한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어떤 틀을 만들고 모든 것을 그 틀에 맞추는 겁니다. 당연히 개성을 원하나 유행을 따르고, 획일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건도 공장에서 같은 것들을 찍어냅니다. 집도 똑같은 구조로 대대적으로 짓습니다. 그러한 공간, 그러한 물건들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거의 엇비슷하게 변합니다. 그들은 생각도 닮아가고 행동도 닮아갑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사람들처럼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생각을 칩에 담아 입력 당한 로봇처럼 같은 생각을 하며 삽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어떤 장소에서 생활하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마음가짐도 행동도 그에 따릅니다. 현대인은 모두 인공적입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기계적으로 행동하고, 기계적으로 생각합니다. 자연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인 존재로 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심이 각박해지고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기계처럼 변하는 겁니다. 자연스러운 감정 대신에 인공적인 이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따뜻한 마음 대신에 사무적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이렇게 껍질은 사람이나 속은 로봇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변하면서도 그 변화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두고 살아가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모모가 생할하는 원형극장은 구조도 생김새도 재료도 자연적인 것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습니다. 커다른 돌로만 지어졌습니다. 관객이 앉는 좌석은 깔때기처럼 겹겹이 계단식입니다. 건물도 획일적이 아니라 원 모양, 갸름한 타원형, 커다란 반원 모양 등 다양합니다. 축구장만큼 큰 것, 자그마한 극장이 있습니다. 장식이 화려한 극장이 있는가 하면 아무 장식도 없는 극장도 있습니다. 이들 극장의 공통점이라면 지붕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늘이 모두 트여 있습니다. 따라서 해가 쨍쨍한 날엔 햇살을 그대로 받고 비가 내리는 날엔 고스란히 그 비를 맞아야 합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런 극장을 갖고 싶어 했답니다.
"그들은, 무대에서 그려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나 우스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면, 무대에서 벌어지는 삶이 자신들의 일상의 삶보다 더 현실 같다는 묘한 느낌을 갖곤 했다. 그들은 이러한 또 다른 현실에 귀기울이기를 좋아했다."
극장의 시대 거기엔 우리 삶을 재현한 연극이 상연되었습니다. 그들에게선 실제로 땀냄새가 났으며, 거친 숨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습니다. 반면 현대는 그런 연극보다는 영화의 시대입니다. 획일화 대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모의 공간은 자연스러운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인간 본래의 생각이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입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 만큼이나 각기 독특한 삶의 모습들이, 울퉁불퉁하면서도 다소곳하게 숨 쉬던 공간입니다. 거기엔 자연이 그대로 스며들어 오고, 자연의 혜택이 그대로 주어지기도 하고, 자연의 심술이 그대로 헤집고 들어오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삶들, 들쭉날쯕한 삶들, 오밀조밀한 삶들이 자연을 닮은 채로 숨쉬고 있었습니다.
가끔 그런 삶의 모습, 못생긴 삶의 모습들이 그립습니다. 잘생긴, 획일화된 삶의 모습들, 공장제품 같은 개성 없는 삶의 모습들 속에 섞여 살면서 우리는 가끔 폐쇄된 공간에 사는 듯한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자연스러움에서 가급적 멀리 가려합니다. 그것이 더 편리하고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 뒤쳐져서 생존마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숨결이, 자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공간이 그립습니다. 획일화를 추진하면서도 개성을 찾는 이 모순 앞에서 가끔 자연을 그리워하고 자연을 찾아 그 자연의 품 속에 들어가기라도 해야겠지요. 우리는 그래도 사람이고 싶으니까요. 오늘은 잠시라도 푸른 가을 하늘을 올려다봐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