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행복한 기말고사

영광도서 0 1,290

즐거울까요? 기분이 좋을까요? 이른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내내 정성 들여 가꾼 곡식, 그 결실을 거두는 농부와 같은 마음일까요? 30여 명의 학생들이 시험을 치룹니다. 기말고사입니다. 적막감이 들만큼 조용합니다. 조용함을 넘어 고요합니다. 소리라곤 학생들이 긋는 셔프나 볼펜이 시험지를 만나 일으키는 사그락사그락거리는 소리뿐입니다. 그 소리가 마치 조용한 명상음악처럼 들립니다. 시험 감독이라면 감독이요. 출제자라면 출제자, 둘을 겸하여 시험자리를 지키며 저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어떤 마음으로 시험을 치룰까 하고요.

 

학생들에겐 다소 불편할 수도, 버거울 수도, 다른 시험보다 골치 아플 수도 있습니다. 주관식 시험이니까요. 반면 객관식 시험이라면 빼도 박도 못하는 정답을 써야 하고 틀리면 기본점수도 없을 테니, 그에 비하면 심리적으로 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오픈북으로 시험을 치루는 덕분에 학생들은 정답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보는 기회를 주고, 굳이 학생들을 감시할 필요 없이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주기만 하면 되기에 주관식 시험을 냅니다.

 

중간고사보다 기말고사에 임하는 학생들의 시험을 보는 자세가 훨씬 진지합니다. 익숙해진 덕분인지, 중간고사 때는 시험 시작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답안지를 내고 나가는 학생들이 절반은 되었는데, 기말고사라서인지, 문제는 같은 수준으로 냈음에도 한 시간이 넘도록 시험을 끝낸 학생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뿐인가요. 중간고사 때는 두 시간을 꼬박 채운 학생이 한 명뿐이었는데, 이번에는 네 명이나 두 시간을 꼬박채웁니다. 한 해 동안 농사를 짓고, 그 결실을 거두는 농부들처럼, 학생들이 진지하게 시험을 치루고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나가면서 시험지를 가져옵니다. 눈을 맞추고 나가면서 학생들에게 나는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는 격려를 하고, 학생들 역시 나름의 인사를 건네고 퇴장합니다. 학기 시작할 때의 어색함보다 이제는 제법 예의를 갖추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뿌듯합니다. 공부하는 자세,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모두에게 A학점을 주어도 좋겠다만 규정이 있으니 그리 할 수 없습니다. 가르치기보다 이들을 평가흐는 것이 더 어려운 까닭이기도 합니다. 시험은 끝나고 이제 내가 이들에게 성적을 주어야 하는 나의 시험이 남은 셈입니다.

 

학생들이 퇴장한 텅빈 교실, 시험지 한 장 한 장 검사를 하면서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깨알처럼 가득 채운 글씨들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마치 그들이 거둔 깨알들 같습니다. 정답이 없는 나름의 답들, 저들에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도록 유도한 게 잘한 것 같습니다. 빈말일지 모르지만, 색다른 수업이었다, 신화를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글쓰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학기에도 수강하겠다,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런 저런 감사의 인사들에서 조금이나마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선입견이 사르륵 사라집니다.

 

주섬주섬 시험지를 챙겨서 교실 밖으로 나섭니다. 뿌듯합니다. 한 학기를 무탈하게 잘 보냈다는 생각, 학생들의 마음에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었다는 생각, 마치 신입생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강의실을 드나들 수 있으니 나 자신 또한 대견스럽습니다. 학생들도 대견스럽고, 나 스스로 대견스러우니, 이번 학기는 의미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거둔 결실들을 이제 내가 거두렵니다. 제대로 잘 이해하고 시험을 보았다면, 그 결실은 또한 나의 결실이니까요. 아마도 풍년이겠지요. 애정어린 마음으로 시험지를 담은 서류봉투를 가슴에 안아봅니다. 가뭄 끝에 드디어 비는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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