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윗세오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까닭

영광도서 0 1,592

풍경은 변합니다. 같은 풍경이어도 금방 다른 풍경으로 변합니다. 누구랑 함께 있느냐, 누구랑 함께 보느냐에 따라 풍경은 다릅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다른 풍경은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내 마음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풍경, 혼자 보는 풍경은 내가 나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산 초입에 마음을 내려놓고 이쯤 올라오면 내가 원하는 풍경을 내가 그릴 수 있습니다. 내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여 고요한 이 시간, 여름을 닮기보다 아직 봄을 닮은 사랑거리는 바람이 스며드는 이 시간, 나는 나만의 풍경, 당신과 함께 있었으면 좋을 풍경을 그립니다.

 

제주도 한라산 윗세오름입니다. 영실코스로 올라와 만세동산을 지나면서 색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완만한 길 1키로 가까이 지나면, 인류의 원초적 고향,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시기도 질투도, 마음을 울렁이게 하거나, 마음을 아리게 하거나, 힘들게 할 아무것도 없는 원초적 고향으로 돌아가는 듯한 운치 있게 펼쳐진 잘 여문 나무테크길을 걷고, 들길 같은 평탄한 길을 걸으면, 윗세오름입구입니다. 영실코스와 어리목코스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여기쯤서 어리목으로 하신해도 그만이요, 그냥 내려가기 아쉬우면 여기서 왕복 4키로미터의 남벽분기점을 돌아오면 더 좋습니다.

 

길을 갑니다. 에덴으로 오른다 생각하고 윗세오름길로 접어듭니다. 길 옆에 앙증맞다기엔 너무 애처로운 작은 꽃 하나 바람에 시달리면서 흔들립니다. 가만 무릎을 꿇고 정성스럽게 폰에 담습니다. 정확히 이름은 모르지만, 바람꽃 정도 될까 싶습니다. 꽃잎이 흰 것이, 내 새끼손가락 끝부분만합니다. 홛대하여 들여다보니 그래고 암술과 수술은 제대로 갖추어 있습니다. 놀란듯이 사정 없이 수술과 암술들이 도리짓합니다. 잡혀가지 않겠다는 듯 바람에게 저항하듯 이리 저리 도리짓합니다. 이런 귀엽고 앙증맞은 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직 자리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 철죽꽃들의 포기들이 한라산 남벽 아래 풍경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만의 풍경, 내가 그리고 싶은 풍경을 만들며 길을 갑니다. 슬며시 지나가려는 나에게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끈질기게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나그네의 시선을 잡는 함박꽃들이 초록 속에서 하얗게 웃습니다. 아니 수줍은 하얀 미소로 걸음을 잡고 유혹합니다. 꽃들만 나를 잡는 게 아닙니다. 내 눈을 잡는 게 있다면 내 귀를 잡는 것 또한 꽤나 여럿입니다. 꽤액 꽥! 뭔 소린가 하여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면 저기쯤 겅충거리며 사랑을 속삭이는 노루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 알았습니다. 저 소리는 서로 사랑좀 하자는 숫노루의 구애라는 걸, 앞에서 도망치듯 유혹하는 암노루를 보니 알겠습니다.

 

그 소리만이 아닙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영롱하여, 저 파란 하늘을 여러 갈래로 조개기라도 할 듯 너무 고운 새들의 노래가 내 귀를 멈추어 세웁니다. 이에 질세라 바람도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합니다. 노란 잔디처럼 지천에 깔린 한라산만의 키작은 조릿대 군락지로 부는 바람이 소슬하니 해맑은 에덴의 찬가를 부릅니다. 모습은 드러나지 않지만 한라산 여기로 부는 바람은 저 그리스의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나 아테나나 헤라쯤 닮았을 거라 나름의 풍경화를 내 마음에 그려냅니다. 이렇게 내 맘껏 내 마음의 그림, 내 그리움의 그림, 내 사랑의 그림을 그리며 상상과 무념을 교차하며 걷다 보면 벌써 남벽 분깃점입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어리목으로 하산하기 위해 올 때 올라온 길은 내려가고, 올 때 내려온 길은 올라갑니다. 오름과 내림이 올 때와 갈 때 다르듯, 기분 또한 다릅니다. 내 마음의 그림 또한 다릅니다. 나는 내가 참 좋습니다.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내가, 내 마음의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내가 참 좋습니다. 물론 당신과 함께를 상상하는 그림도 포함되니 더 좋습니다. 이러 저러한 상상이든 생각이든 잠기다가 깨어나다를 반복하며 온 길을 얼마간 되짚어갑니다.

반환점을 돌듯 여유롭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이제 여유를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절반을 넘어서 하산하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나만의 그림을 살아야겠다고. 아! 나는 내가 참 좋습니다. 내가 나를, 내가 나의 일을, 내가 나의 마음 속 그림을 곱게 그릴 수 있는 내가 참 좋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내가 윗세오름을 올랐다가 윗세오름을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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